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8

 

히브리서 성경공부 8 (5:11-6:12); 성숙한 그리스도인-선과 악을 분별

 

선악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다. 아담의 죄는 그 기준을 바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

5:14 - 성숙하다는 말은 많은 경험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훈련된 지각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19:2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구별됨, 분별함)

왕상3:9 - 주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의 간구)

사사기 21:25 -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로마서 7:21 -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의 한탄)

창세기 4:9 -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의 범죄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23-24)

 

(6:1-3); 기독교의 기본 교리 (elementary doctrine)로부터 성숙한 경지로 나아감

-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세례의 교리,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

- 계속되는 질문의 순환(초보적 신앙);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나요 - 죄 때문입니다 - 믿음을 가지세요 

로마서 5:8 -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2000년전, 우리가 예수를 알기 전에 이미 구원이 완료됨). 우리는 이 구원의 사건을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주어졌고 오직 예수가 구원자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간되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성숙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질문)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인생에 주어지는 수많은 도전과 고난은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시험 (test)이다.

- 삶의 시험에 대한 우리의 반응; 걱정, 원망, 회피 vs. 도전, 살아냄, 버티기

'나는 최선을 다했다'의 의미 (자기 중심적 또는 하나님 중심적)

1) 율법적 최선; 죄 짓지 않는 것 (자기 중심)

- 자기 의를 내세움; 내가 이 일을 주도적으로 했으니 그에 따른 보상도 받아야 한다.

- 자기 변명; 실패에 대한 자기 합리화.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는 최선을 다하지 않음.

2) 예수님의 최선; 순종 (하나님 중심)

- 후회없음의 표현; 결과를 하나님께 맡김. 모든 노력을 다한 사람의 자세. (속옷과 겉옷, 오리와 십리)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활력과 열정, 신실한 노력, 그리고 인내하는 고된 수고의 삶이다.

6:11 - 각자 자신의 소망을 온전하고 확실하게 실현하는 일에도 똑같이 뜨거운 열심을 보이도록

2:12,13 -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

- 이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진리가 되고 그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들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

6:9 - 구원에 이르게하는 더 좋은 것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선을 행하는 용기, 선을 지속하는 인내)

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 (6:10)

2) 같은 열성을 끝까지 나타내어 이루는 소망 (6:11)

3) 게으르지 않는 믿음과 인내 (6:12)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무엇을 믿고 또 믿어야 하는지, 기독교의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이치에 맞는지, 성경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어떻게 어울려야 하고, 또 자신들의 삶과 사고가 복음의 능력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모든 사람을 위한 히브리서, 톰 라이트)

2025년 9월 24일 수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7

 

히브리서 성경공부 7 (4:14-5:10);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예수 부활 이후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이 임박한 혼란의 시기에 (60년 후반)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인용

 

구약시대 5가지 제사;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임시적 해결책)

구약시대 제사를 위한 세 가지: 성전, 제사장, 제물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성취)

   2:19-21 -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4:14 -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1:29 -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3:26 - 화목제물이신 예수

 

권력의 중심이었던 성전의 대제사장 (불완전한 자유함)

- 일시적 죄사함, 죄의식, 두려움 (죽음), 무력감 (절대적 존재)

5:3 - 연약함 때문에, 그는 (대제사장) 백성을 위해서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광야시대 (모세, 아론)

에굽에서의 해방 - 신체적, 물질적 자유. 율법은 영혼에 완전한 자유함을 주지 못했다.

십계명과 금송아지 사건 - 레위지파는 성전의 일을 돕게 된다.

이방여인과의 범죄 (모압) -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 언약, 레위지파의 후손에게 세습 (제사장과 대제사장)

사사시대

모든 신권 권력의 중심, 왕정시대 이전 제사장은 실질적인 정치권력까지 소유 (사무엘).

왕정시대

제사장의 권한은 종교적 제사 담당, 군대 장관과 함께 여전히 정치권력

제사장들 간의 권력다툼도 극심 - 다윗왕 말기, 사독과 나단은 솔로몬을,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천, 이후 사독의 후손들이 제사장의 주류 (사두개파, 모세오경만 인정)

솔로몬 성전 -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중요성 (권력과 특권으로 인해 타락)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로마 식민시대  

제사장과 대제사장의 자리는 돈으로 사고 팔거나, 정치권력에 의해 이용됨 (로마와 결탁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성전중심의 제사법은 중단됨

 

광야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자유함 - 십자가와 부활)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종교활동으로부터의 자유 (죤 칼빈)

시편51:16, 17 - 주님은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며, 내가 번제를 드려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상한심령 (깨어진 마음)입니다. (다윗의 시)

 

광야; 하나님만 바라보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 (누가복음 3:1-2),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 출신이지만 스스로 광야로 나감 (아웃사이더,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놀림)

갈릴리 지역;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광야와 같은 곳 (무기력, 탄식, 슬픔, 분노, )

5:5 -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2:7)

5:6 -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110)

5:6 - 예수께서는 ---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17, 예수님의 기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1)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았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심 (4:15)

2) 세습에 의한 레위가문보다 훨씬 더 우월한 하나님의 대제사장 (단 한번의 제사로 구원을 이룸)

3) 고난을 당하시고 복종을 배우심 (5:8)

만민 제사장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거룩한 땅이며 바로 교회이다. (베드로전서 2:9)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신 교회이며 리더들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자들)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히 자기를 체념하는 자기 파괴자들이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며, 바랄 수 없는 것을 소망하는 미친 자들이고, 자신을 미워함으로써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현명한 자들이다. (공포와 전율, 키에르케고르)

2025년 8월 31일 일요일

창의적 믿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의 본질이며 영생의 삶이다. 교과서를 외우듯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똑같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내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성령하나님은 오직 '' 라는 존재의 깊숙한 곳까지 세세하게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의 깊숙한 곳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각자의 고백을 알고 싶어하셨다.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고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창의적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예수에 대한 고백이 필요하다. 

 

     이 창의적 믿음을 위한 첫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탄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쉬지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삶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섬세하고 광대하심에 매순간 매순간 감사와 찬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당연한 듯, 우연인 듯 여긴다면 그러한 감탄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두번째 조건은 믿음의 주이시며 나를 온전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교회내에서도 우리는 예수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과 구원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외의 다른 곳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거짓 논리에 마음을 빼앗기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무엇보다도 현대 삶의 분주함과 매스미디어는 나의 시선을 온통 헛된 욕망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세번째 조건은 정해진 틀에서만 믿음생활을 하려고 하는 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복신앙적 자세에서 벗어나 복음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건강, 승진, 자녀의 성공, 부의 축적 등 예수믿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근거없는 거짓 논리로 설교하는 수많은 목사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교회출석과 십일조, 교회행사 참여 등의  종교활동이 나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정해진 틀이 교회안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 틀을 깨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모든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네번째 조건은 고난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믿음의 유무에 상관없이 고난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지속적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교회내에 존재하는 기복신앙적 종교행사를 거부할 때 역시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희생과 섬김의 자세 뿐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고 정직의 길을 걸어 가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고난이 발생한다. 세상과 교회 모든 곳에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당당히 맞서지 않으면 창의적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마지막 다섯번째 조건은 매일 매일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전의 안락한 삶을 떠날 용기,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립을 견딜 용기가 그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안락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광야의 자유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에굽의 노예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히브리인들의 모습이 그 예이다. 그러나 갈 곳을 알지 못한채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비록 외로움 속에서 다른 삶을 살지만, 믿음과 용기는 우리를 창의적 믿음을 가진 참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다.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6

 

히브리서 성경공부 6 (3:12-4:13) – 하나님의 안식

 

인간은 돈으로,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자신의 능력으로 편안한 안식을 있다고 믿지만,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안에 있을 때에만 주어진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Non omne quod nitet aurum est"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 화려해보이는 모든 것이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안식에 대한 구절 (, 자유, , 구원, 영생)

안식 (rest, pauo in Greek, to stop, to pause 하던 일을 멈추다)

 

1) 천지창조후 칠일에 안식 (katapauo) 하신 하나님 (2:1-3) - 완전하며 거룩한 안식의 모범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계명) - 참된 안식을 위한 모형, 모든 생명체에 대한 배려 (, 가축),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고백

3) 가나안에 들어가는 안식 (katapauo) - 광야의 수동적 삶을 정리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의 변화, 거룩한 땅에서 농경, 목축, 정착민의 생활

4) 예수가 그리스도임 믿음으로 주어지는 - 죄로부터의 자유

수고하고 무거운 진자들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는 쉬게 (anapauo) 하리라 (11:28)

5) 예수님에 의해 약속된 최종적인 안식 (하나님의 나라) - 우리 삶의 최종 도착지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 14:27)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 (시편 95편 다윗의 시를 인용) - 유대교로 되돌아간 유대인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 같은 구절을 반복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3:7-8, 3:15, 4:7)

 

완고함의 예: 불순종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광야 1세대 히브리인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3:18)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2)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11)

 

하나님은 안식의 약속을 계속 연장하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4:1)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4:6)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4:9)

-하나님은 '오늘'로 날짜를 조정하시며 끊임없이 약속을 갱신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 유진 피터슨)

 

그러한 모든 종류의 일들 (현세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사악함, 육신의 깨끗치 못한 일들)은 노예와 같은 일이다. 안식일의 율법은 그러한 일들을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양심에 평안과 평정을 부여해주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 일곱째 날은 사실상 최종적이며 영원하다.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이사야 66:22-23 -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경배와 예배) 그것이 완성된다. (기독교 강요, 죤 칼빈)

 

말씀의 권위 ( 4:12-13) - 구원약속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셔서 아무 자격없는 나를 조건없이 구원하신다는 신적의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책감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셨다. 나에게 병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치료가 시작되는 것처럼, 나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의 약속 (안식) 받아들일 있다.

2025년 8월 24일 일요일

실천되지 않는 말씀

      말씀은 일차적으로 귀를 통해 들어온다. 그 말씀은 가슴으로 이어져 온 몸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몸으로 들어온 그 말씀이 전혀 표현되지  않고 입으로 그냥 나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그 말씀을 몸으로 이미 실천한 것 처럼 거짓 표현을 추가하기도 한다.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말씀의 깊이와 무게를 한번도 제대로 고민해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항상 핑계가 있다. 일단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최우선 순위이다.  

 

     말씀은 행위로 삶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실천되지 않은 말씀, 고민해 보지 않은 말씀, 묵상되지 못한 말씀은 울리는 꽹가리이며 소음공해일 뿐이다. 인터넷이 어디든지 연결되는 세상에서 말씀은 홍수처럼 넘쳐난다.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의미없는 말씀도 너무 많다. AI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말씀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며 때로는 거짓이 오히려 진실을 덮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은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전달자들과 말씀을 듣는 자들의 태도가 세속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말씀을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비싸고 귀한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꿔버렸다.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쉬지 않고 기도한다.

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새 삶을 향한 안식

  

       천지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지만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조의 질서를 보여 주셨다. 모든 것의 마지막은 쉼이며 그 쉼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요한 순간임을 알려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들어감을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쉼의 표현이 아닌 새로운 신정국가의 시작을 위한 첫 걸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의 수동적 삶 - 행진과 멈춤의 반복, 장막성전,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 등 -을 마치고 새로운 땅에서의 능동적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파별로 땅을 배분하고 집을 짓고 땅을 갈고 식량을 생산해야 하며 소와 양을 기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와 올리브를 길러야 했다. 어쩌면 안식으로 표현된 새로운 땅에서의 그 삶이 광야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힘든 날들일 수도 있었다. 가나안 거민들과 이방신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한다.

 

      인간들은 안식보다는 휴식을 원한다. 마음의 평안함 보다 육신의 편안함을 더 추구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삶은 휴식이나 육신의 편안함이 아니다. 다윗은 시편 95편에서 경고했다. '오늘'이라고 불리는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최종적인 안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emuna)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만 참된 안식을 허락하신다는 약속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의로운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세상적인 삶의 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로 완전히 변화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일단 멈춰야 보인다. 묵상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안식은 새 삶을 향해 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안식은 일단 멈춤이며 그 이후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2025년 8월 3일 일요일

세 가지 소망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비이성적인 숭배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들 정도였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아무런 구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새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비이성적인 믿음은 아무런 소망없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만들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강조 역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사랑을 위해서는 소망이 필요하다.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은 세 가지 소망을 약속했다. 첫째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미 우리가 소유했으며 더 이상 땅의 것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소망의 약속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다는 소망이다. 우리는 지금따지 헛된 것들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결국에는 없어질 세상의 부와 명예만을 위해 살았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셨다. 세번째는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기도의 소망이다. 죄로 인해 단절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이어졌고 자녀된 우리가 얻게 된 가장 큰 특권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매개체가 바로 예수님이 되어주신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하지 않으셨고 세 가지 소망을 주시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해 주셨다.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의지적 지적 호기심

      인공지능시대의 도래는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인류의 폭발적 증가는 이후 산업화, 기계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대도시 지역의 9 to 5의 노동패턴을 만들었다. 시간제 노동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학교 시스템에 적응했다. 즉 어린 시절부터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는 습관은 이후 노동시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되며, 또한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부모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정 시간동안 걱정없이 일할 수 있게 되는 효과도 생겨났다

 

     이러한 사회의 시스템화는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수동적으로 그 시스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해 왔다. 사회가 요구하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인간이 되야 하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며 평범한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그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산업혁명후 그러한 기간이 300-400년 정도 흘렀고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는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순종적인 인간의 지위는 점차적으로 자동화와 AI에게 필연적으로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미래의 인간은 그 AI를 지배하고 조정하는 1%의 인간과 AI의 지배를 받는 99%의 인간으로 양분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 구분되는 현재의 빈부격차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구분은 더 크게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인간들은 삶의 철학을 묵상해야 한다. 단순기술과 반복되는 작업 등의 대부분의 일에서 벗어나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 함께 흘러가는 것이 아닌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나아가는 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의지적 지적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목자가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우리에서 이끌어 내는 것 처럼 자신의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그리고 앞서서 무리를 이끄신다. 나를 포장하는 직책이나 외모, 외적인 나를 지칭하는 세상의 명칭이 아닌 나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의 온전한 자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다운 모습, 즉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를 포장하기 위해 직책을 얻고 물질을 획득하려는 모든 세상적 노력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 이름을 부르듯 나도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그 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존재이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무모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 절대성과 신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조주 앞에 서 있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가기 시작할 때 내 삶의 본래 의미를 찾아간다. 참된 회복이 시작되며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2025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된 인간들은 이제 생계를 위해 땀흘려 일해야 했고 출산의 고통과 함께 자녀를 생산했다. 그리고 일어난 첫번째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갈등이다. 너무나 많은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 갈등의 원인은 잘못된 경쟁과 비교였다. 건전한 경쟁은 문명의 발달을 일으키지만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낸다. 아벨은 선하고 가인은 악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이 사건을 바라보면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를 과학적 추론으로 따지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우리의 예배를 받고 안받고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첫 아들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에 태어난 장자였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실에 분노했고 그로 인한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우를 죽이게 된다. 가인의 모습과 행동은 바로 ''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나의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 다른 사람의 잘됨을 시기한다. 특히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과도한 경쟁과 비교를 통해 원수를 만들어낸다. 하나님이 오직 나의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그러한 잘못된 축복관을 갖고 언제든지 내 형제를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살인을 저지른 가인과 소통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가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랑의 절정이다. 제자들의 배신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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