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하루는 날이 저물면서 시작된다. 즉 그들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까지 나아 온 무리들에게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 (날이 저무는 때)에 예수님은 육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죽은 후 진리의 말씀에 갈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셨고, 허기진 무리들을 육의 양식으로 풍족하게 먹여 주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치유의 기적을 보고 광야까지 따라 온 무리들은 영과 육의 양식을 모두 채워 주신 예수님을 세례 요한같이 세상에 보내진 선지자로 여기고, 왕으로 삼으려 했다. 광야에 모인 2만명 정도의 인원이 왕으로 세운다고 해서 곧바로 유대의 왕이 될 수 없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눈으로 목격한 세 제자들이 그곳에 집을 짓고 머물기를 원했듯,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던 예수님의 능력에 흥분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 옆에 계속 머물러 계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어느 한 무리만을 위해 한 장소에 머물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영지주의적 사고는 우리들의 세계관을 '나'와 '우리' 중심으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무리들은 그들이 본것을 이웃과 이방나라에 전파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by force) 잡아 왕으로 삼고 그들만의 왕국을 만들고자 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만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은 하나님을 우리들만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내가 받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으로 부터 얻어내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을 통한 온 인류의 구원, 이웃 사랑은 나의 우선 순위에서 항상 제외시켜 버린다.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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