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John 11:1-57)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이적들 중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유대사회에 주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기적을 행한 이후 어떤 선지자도 보여주지 못했던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열광했고 반대로 유대 지도자들은 더 이상 예수의 행적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유대 민중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심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로마의 호위속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제거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메시야의 존재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메시야를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진짜 메시야를 부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특권의식은 메시야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100% 확신하지 못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께 원망의 말을 하기도 했고,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신 예수님에게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마르다는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악취가 난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했지만, 진정성 있는 믿음의 확신은 갖지 못했다.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믿음의 모습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도전이다.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10

요한복음 성경공부 10 (8:1-11) - 용서하시는 예수님

 

로마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후 박해가 끝나자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은 배교자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 기독교 신앙을 버린 자들)에 대한 '용서' 였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내용 (8)과 예수를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는 내용 (21)은 원래 요한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후대에 필요에 의해 추가되었다. (마가복음 16:9-20 역시 후대에 추가된 내용)

 

첫번째 상황.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모

1) 이른 아침, 2) 여인 홀로 잡혀 온 상황, 3) 많은 무리들에 의해 현장이 목격된 상황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4) 여인을 굳이 예수님께 데리고 올 필요가 없었다.

 

무리들은 의로움에 가득 차서 율법을 어긴 여인을 예수님께로 끌고 왔다. 타인의 죄를 정죄하면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가증스러운 모습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있다.

 

두번째 상황. 무리들을 물러가게 하신 예수님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예수님은 무리들의 마음 속 깊숙히 살아있는 관대함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극했다.

여인의 죄만 비난했던 무리들은 자신들의 죄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되면 나는 그 어느 누구도 비난 할 수 없게 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스스로 죄 (드러나지 않는)가 있음을 인식한다. (율법으로는 절대로 의로울 수 없다)

 

세번째 상황. 여인과 마주하신 예수님

"너를 고소하던 무리들은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여인은 무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용당했다. 그리고 무리들이 모두 물러간 후 홀로 남았다. 그리고 그 홀로 남겨진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 세상은 나를 철저히 이용하여 죄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나는 수치심과 죄의식에 빠진 채 홀로 그 세상 한복판에 서 있다.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신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 - 나의 모습 (수치심, 포기, 분노, 죄의식), 가면(persona)을 벗은 온전한 나의 얼굴.

페르소나; 인간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즉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포장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그 간격이 커지게 되면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발생한다. (칼 융)

 

네번째 상황. Then what? 한편의 단편소설; 결말을 내지 않고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예수님은 나에게 물어보신다.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는 무엇을 믿느냐? 너는 나를 만나고 있느냐?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자유케하지 못한다. 메마르고 완고한 믿음 

기독교는 신념이 아니다. 비이성적 신념은 폭력적이다. 이기적 소망

기독교는 도덕이 아니다. 선한 삶이 영생을 주지 못한다. 일방적 사랑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본 회퍼)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17:3)"

2023년 10월 6일 금요일

선한목자이신 예수님 (John 10:1-21)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거짓 설교자들에 대하여 요한은 경고하고자 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는 초대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아직 교리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헬라철학을 기반으로 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심을 선한목자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강조했다.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어주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또한 예수님은 선한목자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신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선한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선한목자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안다. 안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를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내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내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계시고 소중히 여겨 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 땅의 영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일시적인 육체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얻기 위해 세상의 축복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람들의 인정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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