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0일 일요일

하나님의 것 (Luke 20)

      포도원의 비유에는 주인인 지주, , 그리고 소작농인 농부 등 모두 세 신분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 농부는 국민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부분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했기에 수확한 작물중 상당한 양을 매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종은 주인의 사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계층이었으며, 신임을 받은 종의 경우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까지 할 수 있었다. 종은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겼고, 때로는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주인과, 종 그리고 농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흔히 지주와 소작농 또는 종의 관계를 착취와 억압의 구조로 보기 쉽다. 그러나 책임있는 지주는 소작농의 권리와 재산을 외부로부터 지켜 주며, 재난으로 인한 흉년의 때에는 오히려 자신의 창고를 열어 식량을 제공 해 주기도 했다.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었던 요셉이 통치하던 시기에 몇년간 가뭄이 지속되자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소작농이 되었고, 요셉은 보관하고 있던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원래 지주, , 농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협력의 구조였고, 만약 이러한 관계가 악용될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희년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욕심 많은 주인, 충성되지 못한 종, 그리고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농부들은 이 협력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관계 단절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다.

 

    오랫동안 포도원을 떠나있는 주인으로 인해, 소작농인 농부들은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듯 착각했고,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은 나머지 소출을 받기 위해 온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렸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관계 단절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소외와 분리이며, 죽음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은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그 굳건한 반석위에 예수님은 자신을 버린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그로 인해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2022년 11월 15일 화요일

위험을 감수하는 삶 (Luke 19)


    사람들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일상을 원하며, 그러한 삶을 위해서 어느 정도 물질이 필요하기에, 노동을 통해 삶의 자원을 얻는다. 문제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한정된 물질을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로 변해 버렸다. 삭개오는 그 경쟁을 통해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자신의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정말 귀한 것 - 사랑, 희생, 인내, 자비 등 -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 보이지 않는 귀한 가치의 정점에 영생이 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을 잡은 자나 일반 민중들이나 모두 막연하게나마 영생을 갈망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마음 깊숙한 곳에 절대적 존재에게 회귀하려는 본질적 소망을 갖고 있으며, 소망의 궁극적 목적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그 하늘 나라의 실체를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허락하셨다

 

     영생은 가장 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영생의 선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이며, 빚진 자에게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안정되고 편안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삶 속에는 고난과 실패가 있으며, 인내와 무한한 희생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나라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삶은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한다.

 

     삭개오의 삶은 안전함을 최대한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영생의 삶으로 변화했다. 한 므나의 은화를 받은 종은 그 위험을 감수하며 이득을 남겼지만, 그러지 못한 종은 있는 것조차 빼았겼다. 위험을 감수하며 믿음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은혜로 주어진 영생의 삶은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 있음을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2022년 11월 7일 월요일

순수한 소망 (Luke 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 당시 민중들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익숙한 것들 -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들, 무화과나무, 병든 사람, 부자, 거지, 씨앗, 누룩, 잔치, 포도주 등-을 예로 들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삶과 멀리 떨어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셨다. 절대적 진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자였던 어린 아이들 같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정해진 세속적 사회의 규범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러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런 편견도 없이 쉽게 친구들을 사귀며, 기존의 사고방식이 없기에 창조적인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낸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물질관과는 전혀 다른 경제관념을 갖고 있으며, 자신에게 돌아 올 어떠한 이득을 생각하지 않은 채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뛰어다니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몸으로 배운 것들을 습득하면서 성장한다.  

  어린 아이는 세속적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다. 그는 부자였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지켰음을 강조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가 정해 놓은 엄격한 사회적 규범을 철저하게 지켜왔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영생의 길을 따르지 못했다.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속의 삶에 집착하고 있기에 진짜 삶을 살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은 우리에게도 있다. 영생의 진리는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는 그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지만, 세상의 염려와 걱정은 우리에게 장애물로 작용한다. 미사려구를 동원해 여기에 진리가 있다, 저기에 진리가 있다고 우리의 입맛에 맞게 외치는 거짓 선동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한다.  

 

  세상의 염려와 걱정은 진리로의 길을 방해한다.

 

     세속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어린 아이들 처럼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소망이 우리를 진짜 삶으로 인도한다.

2022년 11월 3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10

10. 새로운 형태의 율법; 생명의 성령의 (로마서 8 1 – 17)

  

바울의 최종 선언

 

So,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3:9-10)

But now,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3:21).

Therefore,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8:1)

-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 때문에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들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8:2)

-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과 성령안에서 행하셨기 때문에 (8:3)

-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성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에 (8:4)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을 죄를 인식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죄는 용서받았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와 거룩으로 이끈다. 이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간다.  "너희도 거룩하라 (레위기 11)."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죽음의 법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

생명과 평화

죽음, 적대감 

하나님께 빚진 자 (속량)

육신에 빚진 자 ()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

노예의 영

 

복음의 핵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님)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 자기의 아들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 따라 사는 우리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완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8:3-4)

 

번제; 동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 예배때 드려지는 일반 제사 (Holocaust, 아벨)

소제; 곡식을 드리는 제사로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일반 제사 (가인)

화목제; 특별한 서원이나 감사를 표현할 때 드리는 제사

속죄제; 알지 못하거나 (잘못이란 사실을 모른 ) 본의 아니게 저지른 죄

속건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잘못 사용하거나, 계명을 어겼을 때, 신실하지 못한 죄

 

하나님의 자녀 (영생의 선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1:12)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한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 8:16-17)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음;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에 참여 (하나님의 나라)

2.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고난)

3.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 은혜로 받은 구원이기에 은사를 나누어야 한다 (의무)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볼 수 없는 것을 소망함

    우리는 알지 못하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다. 평생을  눈먼 자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게 되면 사과를 보아도 사과인 줄 모른다. 정상인들도 사과와 똑같이 생긴 모형사과를 구분할 때는 향기 (후각)나 만져봄 (촉각)을 이용하며, 그 감각은 선험적 (a priori) 으로 이미 습득했던 것들이다. , 사과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모든 감각들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이 이미 나의 인식속에 경험 되었기에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게 된다. 또한 색깔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물체의 색을 구별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질문 이전에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물론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절대자를 알고 인식하게 될 때 (감각과 오감으로), 비로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즉 그 존재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 (20:29) 고 가르치셨으며,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 8 24절에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인식의 우선성은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에도 적용되는데, 빛을 파동으로 인식하면 파동으로 존재하며, 빛을 입자로 인식하면 입자로 존재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했으며, 하나님은 "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했다. 이 대답의 의미는 하나님은 존재 (완전성)시며, 인간은 존재가 아닌  불완전성을 가진 피조물, 즉 존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전체를 포함하며, 규정할 수 없는 바다와 같으며, 무한하시고, 불가시적이기에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만물 (존재자)이 주 (존재)로부터 나오고 주 (존재)께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언젠가 우리 눈에서 수건이 벗어지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날을 소망하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고전 13:12-13).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에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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