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John 13:1-38)

   신약시대에 찾아온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 집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종의 위치에서 주인과 손님을 섬기듯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옛 계명들을 완성하는 최종적인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아보게 된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적 시각으로 우리들은 돈, 명예, 지위, 안정된 삶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명령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높은 지위에서 군림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우리는 물질적 만족을 누리며 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섬김받고 싶어한다.

 

     우리들은 여전히 구약적 축복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우리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고 있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들이 보여주었던 잘못된 믿음의 행위들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11

 요한복음 성경공부 11 (8:12-59) 자유케하시는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8:12)

더 이상 어둠의 막다른 길 (no way out under dark)에서 헤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에서 행하신다.

 

A. 인간이 처한 육체적 한계

"너희는 육체 (사람이 정한 기준, human standard)를 따라 판단한다" (8:15)

우리들은 물질적인 한계 (3차원적)의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이 현상세계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ex) 뉴턴의 물리법칙 -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역학)

 

"우리는 그분에게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감히 부과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우리의 감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된다" (죤 칼빈, 기독교 강요)

 

유대인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숭배한다.

현대인들; , 명예, 지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숭배한다.

우리의 공허한 정신과 죄성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긴다.

 

B. 인간이 처한 죄의 한계

말에 거하면 - 참 내 제자가 되고 - 진리를 알찌니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

말에 거함;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1-2), 말씀대로 사는 것

제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12)

진리;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14)

자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위에 은혜 (blessing after another)를 받았다 (1:16)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물 (gift after gift after gift, 메세지, 유진 피터슨)

 

유대인; 율법을 지킴으로 자유할 수 있다고 주장 - 불가능하다

영지주의; 우리의 노력으로 수련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 - 댓가로 얻음

예수님; 예수 (로고스)가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일 때 진리를 알게 된다 - 댓가없이 주어짐

 

유대인들의 자유; 간음한 여인을 율법에 따라 죽일 수 있는 자유

예수님의 자유; 죄지은 여인을 용서하여 살리는 자유

 

C. 인간이 처한 편견의 한계 (유대인의 특권의식)

유대인들의 질문; 당신은 누구요? (8:25),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8:39)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편견 (prejudice, stereotype)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베이컨 (Francis Bacon, Knowledge is power); 동굴의 우상 (주관적 선입견), 극장의 우상 (무비판적 수용), 종족의 우상 (집단이기주의, 비이성적 신념), 시장의 우상 (언어적 오류, 과장된 상품명)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받은 복을 수동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내가 한 선택이 옳은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의 과정들을 의미한다.    

2023년 11월 12일 일요일

하나님이신 예수님 (John 12:12-50)

   구약의 위대한 예언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이미 예언된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이셨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도 이미 이사야의 예언에 계시되었다. 수백년전 이사야는 이미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실체를 눈으로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머리로는 메시야를 알고 있지만 정작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이다. 사람의 영광은 덧없다. 육체의 목숨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영광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의 마음은 무디어져 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게 예수님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계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불순종의 자녀들을 예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우리들은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 (John 12:1-11)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은 마리아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마리아도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단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며 예수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수한 마음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귀한 섬김의 행위가 되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께 드렸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계시하시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기에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도 일하심을 믿는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힘을 북돋는 격려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쳐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하게 살아서 내 의가 드러나고 그 선함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 선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땅위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마리아의 순종적 행동을 본 유다는 위선적 태도로 비난했다. 많은 무리들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러 몰려들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인기를 질투하여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관심밖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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