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31일 일요일

창의적 믿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믿음생활의 본질이며 영생의 삶이다. 교과서를 외우듯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을 똑같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내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성령하나님은 오직 '' 라는 존재의 깊숙한 곳까지 세세하게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의 깊숙한 곳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각자의 고백을 알고 싶어하셨다.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믿음의 여정이고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창의적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나 자신의 예수에 대한 고백이 필요하다. 

 

     이 창의적 믿음을 위한 첫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감탄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쉬지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삶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섬세하고 광대하심에 매순간 매순간 감사와 찬양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당연한 듯, 우연인 듯 여긴다면 그러한 감탄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두번째 조건은 믿음의 주이시며 나를 온전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교회내에서도 우리는 예수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모습과 구원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외의 다른 곳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거짓 논리에 마음을 빼앗기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는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무엇보다도 현대 삶의 분주함과 매스미디어는 나의 시선을 온통 헛된 욕망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세번째 조건은 정해진 틀에서만 믿음생활을 하려고 하는 습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복신앙적 자세에서 벗어나 복음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건강, 승진, 자녀의 성공, 부의 축적 등 예수믿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근거없는 거짓 논리로 설교하는 수많은 목사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교회출석과 십일조, 교회행사 참여 등의  종교활동이 나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정해진 틀이 교회안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 틀을 깨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모든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네번째 조건은 고난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믿음의 유무에 상관없이 고난은 누구에게나 예고없이 지속적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교회내에 존재하는 기복신앙적 종교행사를 거부할 때 역시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희생과 섬김의 자세 뿐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고 정직의 길을 걸어 가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고난이 발생한다. 세상과 교회 모든 곳에서 다가오는 어려움들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이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당당히 맞서지 않으면 창의적 믿음을 지킬 수 없다

 

      마지막 다섯번째 조건은 매일 매일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전의 안락한 삶을 떠날 용기,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고립을 견딜 용기가 그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안락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광야의 자유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에굽의 노예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히브리인들의 모습이 그 예이다. 그러나 갈 곳을 알지 못한채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비록 외로움 속에서 다른 삶을 살지만, 믿음과 용기는 우리를 창의적 믿음을 가진 참 신앙인으로 만들어 준다.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6

 

히브리서 성경공부 6 (3:12-4:13) – 하나님의 안식

 

인간은 돈으로,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자신의 능력으로 편안한 안식을 있다고 믿지만,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안에 있을 때에만 주어진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Non omne quod nitet aurum est"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다. 화려해보이는 모든 것이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안식에 대한 구절 (, 자유, , 구원, 영생)

안식 (rest, pauo in Greek, to stop, to pause 하던 일을 멈추다)

 

1) 천지창조후 칠일에 안식 (katapauo) 하신 하나님 (2:1-3) - 완전하며 거룩한 안식의 모범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십계명) - 참된 안식을 위한 모형, 모든 생명체에 대한 배려 (, 가축), 삶으로 보여주는 신앙고백

3) 가나안에 들어가는 안식 (katapauo) - 광야의 수동적 삶을 정리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의 변화, 거룩한 땅에서 농경, 목축, 정착민의 생활

4) 예수가 그리스도임 믿음으로 주어지는 - 죄로부터의 자유

수고하고 무거운 진자들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는 쉬게 (anapauo) 하리라 (11:28)

5) 예수님에 의해 약속된 최종적인 안식 (하나님의 나라) - 우리 삶의 최종 도착지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 14:27)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 (시편 95편 다윗의 시를 인용) - 유대교로 되돌아간 유대인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 같은 구절을 반복한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3:7-8, 3:15, 4:7)

 

완고함의 예: 불순종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광야 1세대 히브리인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3:18)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2)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11)

 

하나님은 안식의 약속을 계속 연장하며 우리를 초대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4:1)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4:6)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4:9)

-하나님은 '오늘'로 날짜를 조정하시며 끊임없이 약속을 갱신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 유진 피터슨)

 

그러한 모든 종류의 일들 (현세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사악함, 육신의 깨끗치 못한 일들)은 노예와 같은 일이다. 안식일의 율법은 그러한 일들을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선한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양심에 평안과 평정을 부여해주는 성령의 인도에 의해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 일곱째 날은 사실상 최종적이며 영원하다. 우리 모두는 부분적으로 그것에 들어갔지만 아직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안식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서 또한 매일 진보를 이루어 마침내 이사야의 말이 실현될 때 (이사야 66:22-23 -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경배와 예배) 그것이 완성된다. (기독교 강요, 죤 칼빈)

 

말씀의 권위 ( 4:12-13) - 구원약속에 대한 확신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기독교신앙의 핵심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셔서 아무 자격없는 나를 조건없이 구원하신다는 신적의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책감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셨다. 나에게 병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치료가 시작되는 것처럼, 나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의 약속 (안식) 받아들일 있다.

2025년 8월 24일 일요일

실천되지 않는 말씀

      말씀은 일차적으로 귀를 통해 들어온다. 그 말씀은 가슴으로 이어져 온 몸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몸으로 들어온 그 말씀이 전혀 표현되지  않고 입으로 그냥 나가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그 말씀을 몸으로 이미 실천한 것 처럼 거짓 표현을 추가하기도 한다.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말씀의 깊이와 무게를 한번도 제대로 고민해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항상 핑계가 있다. 일단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최우선 순위이다.  

 

     말씀은 행위로 삶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실천되지 않은 말씀, 고민해 보지 않은 말씀, 묵상되지 못한 말씀은 울리는 꽹가리이며 소음공해일 뿐이다. 인터넷이 어디든지 연결되는 세상에서 말씀은 홍수처럼 넘쳐난다.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의미없는 말씀도 너무 많다. AI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감동할 만한 말씀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며 때로는 거짓이 오히려 진실을 덮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은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전달자들과 말씀을 듣는 자들의 태도가 세속적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말씀을 자신의 의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비싸고 귀한 은혜를 값싼 은혜로 바꿔버렸다. 나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쉬지 않고 기도한다.

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새 삶을 향한 안식

  

       천지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제 칠일에 안식하셨다.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지만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조의 질서를 보여 주셨다. 모든 것의 마지막은 쉼이며 그 쉼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요한 순간임을 알려주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들어감을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으로 표현했다. 단순한 쉼의 표현이 아닌 새로운 신정국가의 시작을 위한 첫 걸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의 수동적 삶 - 행진과 멈춤의 반복, 장막성전, 만나와 메추라기의 공급 등 -을 마치고 새로운 땅에서의 능동적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파별로 땅을 배분하고 집을 짓고 땅을 갈고 식량을 생산해야 하며 소와 양을 기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와 올리브를 길러야 했다. 어쩌면 안식으로 표현된 새로운 땅에서의 그 삶이 광야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힘든 날들일 수도 있었다. 가나안 거민들과 이방신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한다.

 

      인간들은 안식보다는 휴식을 원한다. 마음의 평안함 보다 육신의 편안함을 더 추구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의 삶은 휴식이나 육신의 편안함이 아니다. 다윗은 시편 95편에서 경고했다. '오늘'이라고 불리는 그 시점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최종적인 안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emuna)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만 참된 안식을 허락하신다는 약속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하나님의 의로운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안식은 세상적인 삶의 태도를 멈추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로 완전히 변화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일단 멈춰야 보인다. 묵상은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안식은 새 삶을 향해 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안식은 일단 멈춤이며 그 이후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2025년 8월 3일 일요일

세 가지 소망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비이성적인 숭배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들 정도였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아무런 구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새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비이성적인 믿음은 아무런 소망없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만들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강조 역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사랑을 위해서는 소망이 필요하다.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은 세 가지 소망을 약속했다. 첫째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미 우리가 소유했으며 더 이상 땅의 것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소망의 약속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다는 소망이다. 우리는 지금따지 헛된 것들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결국에는 없어질 세상의 부와 명예만을 위해 살았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셨다. 세번째는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기도의 소망이다. 죄로 인해 단절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이어졌고 자녀된 우리가 얻게 된 가장 큰 특권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매개체가 바로 예수님이 되어주신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하지 않으셨고 세 가지 소망을 주시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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