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공정한 방법을 선호한다. 룰을 지키고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고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질타해야 한다. 물론 백퍼센트 완전한 공정함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방향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국가와 공공권력이 존재하는 하나의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동의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성실하게 능력을 발휘해서 일한 사람은 그 만큼의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이야기 (마태복음 20장)는 이러한 공정성에 중요한 하나의 도전을 던진다. 새벽 일찍부터 포도원으로 불려와서 하루 종일 포도 수확을 한 일꾼들은 거의 열두 시간을 일했다. 그보다 늦게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심지어 다섯 시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들도 있었다. 이들은 광장에서 주어질 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포도원 주인을 만나서 포도원으로 오게 되었다. 일이 다 끝나고 그날의 임금을 받을 때 주인은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하루치 임금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새벽부터 열심히 하루종일 일한 일꾼들은 이러한 주인의 임금지불 방식에 분노했으며 이의를 제기했고 주인은 이를 무시했다. 세상적 기준에서 이것은 분명한 공정성의 훼손이고 불합리한 처사였기에 그들의 불평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준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가치와 다른 무엇이 있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공정성을 뛰어 넘는 더 큰 가치는 무었일까?
첫째는 관계적, 공동체적 가치이다. 포도원은 혼자서 절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하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은 서로 일을 도와가며 귀한 관계성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공동체 의식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둘째는 절대적 존재의 가치이다. 포도원에서 주인은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있다. 모든 소유의 주체이며 임금을 지불하는 절대적존재이다. 모든 일꾼들은 그 주인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절대적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며 그분은 모든 선악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의 원죄는 바로 그 선악 판단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의 임금 지불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주인의 절대적 결정사항이다.
세째는 관대함의 가치이다. 공정성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필연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포도원 주인이 오후에 광장에 갔을 때 여전히 일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은 실망감, 초조함 그리고 패배감을 갖고 있었으며 아마도 그들은 여성이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약자계층이었을 수도 있었다. 공정함의 입장에서 그들은 분명히 능력이 없거나 노력을 하지 않은 빈둥빈둥거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승리자와 강한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세상의 공정성의 논리가 그 약자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한 모습은 아닐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뛰어넘는 관계적 공동체적 가치, 절대적 존재의 가치, 그리고 관대함의 가치를 갖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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