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3일 일요일

세 가지 소망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비이성적인 숭배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만들 정도였다.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아무런 구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새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비이성적인 믿음은 아무런 소망없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만들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강조 역시 사람들을 지치게 만든다

 

     사랑을 위해서는 소망이 필요하다.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은 세 가지 소망을 약속했다. 첫째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영원한 하늘나라를 이미 우리가 소유했으며 더 이상 땅의 것만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소망의 약속이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다는 소망이다. 우리는 지금따지 헛된 것들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결국에는 없어질 세상의 부와 명예만을 위해 살았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들임을 알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셨다. 세번째는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기도의 소망이다. 죄로 인해 단절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이어졌고 자녀된 우리가 얻게 된 가장 큰 특권이 바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기도의 매개체가 바로 예수님이 되어주신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강조하지 않으셨고 세 가지 소망을 주시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해 주셨다.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의지적 지적 호기심

      인공지능시대의 도래는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농업혁명으로 인한 인류의 폭발적 증가는 이후 산업화, 기계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대도시 지역의 9 to 5의 노동패턴을 만들었다. 시간제 노동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학교 시스템에 적응했다. 즉 어린 시절부터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는 습관은 이후 노동시간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게 되며, 또한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부모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정 시간동안 걱정없이 일할 수 있게 되는 효과도 생겨났다

 

     이러한 사회의 시스템화는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에게 수동적으로 그 시스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해 왔다. 사회가 요구하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인간이 되야 하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며 평범한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없이 그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산업혁명후 그러한 기간이 300-400년 정도 흘렀고 그렇게 자본주의 사회는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순종적인 인간의 지위는 점차적으로 자동화와 AI에게 필연적으로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미래의 인간은 그 AI를 지배하고 조정하는 1%의 인간과 AI의 지배를 받는 99%의 인간으로 양분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물질로 구분되는 현재의 빈부격차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구분은 더 크게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인간들은 삶의 철학을 묵상해야 한다. 단순기술과 반복되는 작업 등의 대부분의 일에서 벗어나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 함께 흘러가는 것이 아닌 어떤 방향으로 세상이 나아가는 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의지적 지적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목자가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우리에서 이끌어 내는 것 처럼 자신의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그리고 앞서서 무리를 이끄신다. 나를 포장하는 직책이나 외모, 외적인 나를 지칭하는 세상의 명칭이 아닌 나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의 온전한 자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다운 모습, 즉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를 포장하기 위해 직책을 얻고 물질을 획득하려는 모든 세상적 노력은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 이름을 부르듯 나도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를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그 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절대적 존재이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무모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 절대성과 신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조주 앞에 서 있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알아가기 시작할 때 내 삶의 본래 의미를 찾아간다. 참된 회복이 시작되며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2025년 7월 28일 월요일

하나님의 사랑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된 인간들은 이제 생계를 위해 땀흘려 일해야 했고 출산의 고통과 함께 자녀를 생산했다. 그리고 일어난 첫번째 사건이 가인과 아벨의 갈등이다. 너무나 많은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 갈등의 원인은 잘못된 경쟁과 비교였다. 건전한 경쟁은 문명의 발달을 일으키지만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낸다. 아벨은 선하고 가인은 악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로 이 사건을 바라보면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는지를 과학적 추론으로 따지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기준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고, 우리의 예배를 받고 안받고를 결정하는 주체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첫 아들이며 하나님의 계획하에 태어난 장자였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실에 분노했고 그로 인한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자신의 아우를 죽이게 된다. 가인의 모습과 행동은 바로 ''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나의 원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 다른 사람의 잘됨을 시기한다. 특히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과도한 경쟁과 비교를 통해 원수를 만들어낸다. 하나님이 오직 나의 편안한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축복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그러한 잘못된 축복관을 갖고 언제든지 내 형제를 죽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살인을 저지른 가인과 소통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가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랑의 절정이다. 제자들의 배신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을 우리에게 실제로 보여주셨다.

2025년 7월 23일 수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5

 

히브리서 성경공부 5 (3:1-11) –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의 주제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3:1)

 

우리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

예수님; 하나님이 보내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진정한 대제사장 (죄사함, 구원)

 

모세에 대한 성경의 기록 (히브리민족의 지도자, 유대교의 창시자, 십계명)

위대한 지도자 (신명기 34:10) -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하나님과 대면한 자 (신명기 34:10) -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 (민수기 12:3) -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변화산 ( 9:4) -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모든 이스라엘은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이며 구원자로 숭배했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비교

모세

예수그리스도

히브리 남자 아기들의 죽음

예수 탄생 후 베들레헴 남자 아이들의 죽음

에굽의 왕자로 성장

지혜와 키가 자람, 성전에서 랍비와 토론

에굽의 왕자를 포기

하늘의 왕좌를 포기

광야로 피신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시험 당함

하나님을 만남

하늘에서 음성,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음

사역을 시작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

10가지 기적적 재앙

수많은 이적과 치유

에굽에서 해방

옛 율법으로부터 해방

광야 40년간 히브리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을 영생으로 인도

하나님의 율법을 받음 (십계명)

새 계명 (사랑)을 선포하시며 율법을 완성

광야의 성막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지음

교회를 약속하심 (성령의 내주, 거룩한 성전)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중보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구원의 길이 되심

가나안을 바라보며 생애를 마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극복하심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우월하시다.

모세의 생애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 (이삭, 요셉, 다윗, 엘리야 등)이다.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 ---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 (3:3-4)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는 일꾼으로 충성하였고 (3:5)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3:6)

 

하나님의 백성(우리들)에 대한 놀라운 표현 (3:6)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개역성경)

"우리가 그 소망을 두고 확신과 자랑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새번역)

"우리가 이 담대한 확신을 굳게 붙들면 우리가 바로 그 집입니다" (메시지성경)

 

광야에서 히브리 백성들의 삶 (시편 95:7-11) -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함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 옛 삶으로 돌아감

하나님을 시험 (증거를 요구함) - 나의 욕심을 소원함

세상의 유혹에 굴복, 불순종 (하나님을 거부함) - 세속적 신앙, 물질적 신앙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음 (감사하지 않음) - 하나님을 알지 못함, 일상의 당연함

하나님의 경고 -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3:11)

2025년 7월 22일 화요일

내 존재의 본질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 앞에 고개 숙이게 된다. 이 과정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눈앞에서 마주한 모세는 자신이 과거 걸어온 모든 것과 삶의 가치관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 앞에 섰다

     내 것과 나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하나님의 영광과 마주한다. 내 노력과 내 의로 이룬 것들을 움켜쥐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이룬 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를 통해 가치 있다고 착각하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본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나의 존재 속에 있다. 즉 내 존재 안에 있던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의지적으로 사용하여 성령의 열매가 맺힐 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것이 나의 진정한 본질이다. 사랑과 희생과 자비와 절제된 삶을 살 때가 바로 '나' 라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과 섬김으로 살아야 한다. 명예나 높은 지위, 경제적 부는 결코 나를 정의하지 못하며 나의 존재의 본질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이 나를 영광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며 하나님은 나를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높여 주신다. 이 진짜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의 경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025년 7월 15일 화요일

메타노이아 (Metanoia)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유대교에 정신적 뿌리를 둔 히브리인들이었다. 즉 유일신 사상에서 출발한 모세의 시내산 신앙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과 3년을 동고동락하며 지냈고, 그 예수가 들려주는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과 병고침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는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을 보며, 특히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그들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메타노이아 (패러다임의 전환)가 일어났다.  

 

     바로 그들과 함께 지내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이외의 또 다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더구나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의 체험 이후 제자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미리 계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그들이 믿어 왔던 하나님과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리고 보혜사 성령까지, 제자들은 이 삼위의 하나님을 복음과 함께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그러나 이 신비의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큰 한계가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은혜의 사건은 우리의 체험적 신앙을 통한 전환점으로부터 나의 삶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갈 때 증명된다. 즉 삼위 하나님의 존재를 내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 내가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이다.

2025년 7월 14일 월요일

공정함을 뛰어넘는 귀한 가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공정한 방법을 선호한다. 룰을 지키고 성실하게 일한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고 책임을 다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질타해야 한다. 물론 백퍼센트 완전한 공정함이 현실 세계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방향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국가와 공공권력이 존재하는 하나의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동의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성실하게 능력을 발휘해서 일한 사람은 그 만큼의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의 이야기 (마태복음 20)는 이러한 공정성에 중요한 하나의 도전을 던진다. 새벽 일찍부터 포도원으로 불려와서 하루 종일 포도 수확을 한 일꾼들은 거의 열두 시간을 일했다. 그보다 늦게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심지어 다섯 시부터 일을 시작한 일꾼들도 있었다. 이들은 광장에서 주어질 일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포도원 주인을 만나서 포도원으로 오게 되었다. 일이 다 끝나고 그날의 임금을 받을 때 주인은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하루치 임금 (한 데나리온)을 지불했다. 새벽부터 열심히 하루종일 일한 일꾼들은 이러한 주인의 임금지불 방식에 분노했으며 이의를 제기했고 주인은 이를 무시했다. 세상적 기준에서 이것은 분명한  공정성의 훼손이고 불합리한 처사였기에 그들의 불평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처음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준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가치와 다른 무엇이 있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공정성을 뛰어 넘는 더 큰 가치는 무었일까?

 

첫째는 관계적, 공동체적 가치이다. 포도원은 혼자서 절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하루종일 포도원에서 일한 일꾼들은 서로 일을 도와가며 귀한 관계성을 경험했을 것이고 그 공동체 의식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둘째는 절대적 존재의 가치이다. 포도원에서 주인은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있다. 모든 소유의 주체이며 임금을 지불하는 절대적존재이다. 모든 일꾼들은 그 주인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절대적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며 그분은 모든 선악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의 원죄는 바로 그 선악 판단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포도원 주인의 임금 지불은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주인의 절대적 결정사항이다


세째는 관대함의 가치이다. 공정성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필연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포도원 주인이 오후에 광장에 갔을 때 여전히 일을 구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은 실망감, 초조함 그리고 패배감을 갖고 있었으며 아마도 그들은 여성이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약자계층이었을 수도 있었다. 공정함의 입장에서  그들은 분명히 능력이 없거나 노력을 하지 않은 빈둥빈둥거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승리자와 강한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세상의 공정성의 논리가 그 약자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한 모습은 아닐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정함이라는 가치를 뛰어넘는 관계적 공동체적 가치, 절대적 존재의 가치, 그리고 관대함의 가치를 갖고 있는 곳이다.

 


2025년 6월 25일 수요일

히브리서 성경공부 4

 

히브리서 성경공부 4 (2:10-18) – 예수와 나는 한 형제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Man-made Gods) - 인본주의, 현세, 다신주의 (범신론), 개방성, 신은 불멸, 인간은 유한, 신과 인간은 구별됨, 세상은 신들의 놀이터,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가진 신들, 신이 되고 싶은 인간, 운명론, 신의 존재가 나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주지 못함 -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신  

유대교 (헤브라이즘, God-made man) - 신본주의, 내세, 유일신, 배타성, 선민의식, 절대적 존재, 자기 의, 자력 구원, 두려움의 대상 - 신의 존재가 삶에 족쇄가 됨

 

예수님의 성육신사건은 2000년전 일반적인 사상적 문화를 완전히 깨뜨렸다.

인간 실존: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

하나님의 은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가족이 되심 - 구원

인간의 타락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함)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방법

-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셔서 속죄제물이 되시고 인간안에 내주하심: 삼위일체  

 

예수 그리스도 (태초부터 존재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심)

1. 구원의 창시자 (개척자); 용기 (courage) - 열정 (passion)

2. 죽음을 극복 (고난당함); 순종 (obedience) - 희생 (sacrifice)

3. 대제사장 (자비롭고 충성스러움); 동정심 (sympathy) - 책임감 (responsibility) 

하나님(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 그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완전케 하셨다 (2:10)

예수님 (거룩하게 하신 분)과 인간들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한 형제임을 선포하셨다 (2:11)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 (2:12)

-시편 22편 인용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내용)

예수는 100% 인간성 (살과 피)을 지니셨기에 우리의 희생제물이 될 수 있었다 (2:14)

인간은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 하는 존재 (출애굽 당시의 상황)에서 해방됨 (2:15)

 

사람들의 일반적 질문 (HOW?) – 부정적 의도의 표현 (설명 불가능, 비신앙적 핑계)

어떻게 신이 사람의 육신으로 태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처녀가 잉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가? 어떻게 물이 포도주로 변할 수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지 못할 사건들의 가장 근본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사랑은 과학적으로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놀라움과 감사뿐이다.

 

내가 해야 할 진짜 질문 (WHO?) - 존경과 놀라움의 표현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듣고 체험한 후 변화된 사람들의 반응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4:35-41)

도마의 고백 - "나의 주, 나의 하나님" (20:28)

백부장의 고백 -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27:54)

예수님은 누구인가? - 내가 평생동안 고민하고 묵상해야 할 질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 인간 존재의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예수님의 질문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대로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역사적 인물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답은 내가 묵상하고 고백하는 예수이다.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13-18) - 내 믿음의 이유를 고백해야 한다.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이 믿음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다시 말하면 나의 믿음의 고백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우리 몸은 거룩한 성전) 이 고백의 교회는 실패, 좌절, 눈물, 후회, 회개, 회복, 소망이 모두 혼재하는 곳이며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거룩한 곳이다.

본 회퍼: 나를 위한 (pro-me) 그리고 우리를 위한 (pro-nobis) 존재이며 낮아지고 높아지신 분

2025년 6월 14일 토요일

진짜 삶을 사는 사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은 하는 사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하는 사람
잘못한 일은 사과하고 잘한 일은 드러내지 않는 사람
못가진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가진 것은 자랑하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한 사람
세상의 불공정을 불평하지 않고 스스로 공정하게 행동하는 사람
핑계거리를 찾지 않고 해결 할 방법을 찾는 사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람
어제의 실수는 빨리 잊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
번잡한 곳에 가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
불필요한 걱정은 무시하고 필요한 일에 집중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람


최근 글

세 가지 소망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