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진짜 가치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물질적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한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돈으로 고급 포도주를 살 수 있지만, 기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맛있는 빵을 살 수 있지만, 맛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깨끗한 물을 살 수 있지만, 영원한 생수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향 좋은 에스프레소를 살 수 있지만, 삶의 여유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명품 시계를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큰 집을 살 수 있지만, 화목한 가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매력 있는 이성 (여성, 남성)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지만, 깊은 잠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권위있는 의사를 살 수 있지만,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비싼 보험을 살 수 있지만, 안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효능 있는 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안락한 의자를 살 수 있지만, 편안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흠 없는 소나 양을 살 수 있지만, 죄 사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일등석 항공권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고급 정보를 살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비밀을 살 수는 없다.


2022년 12월 24일 토요일

비존재 (Luke 24)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셨고, 이전과 똑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 수 없다. 따라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다' 라는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헬라철학의 핵심 논리이다.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의 개연성이다. 시간은 물론 공간까지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삼단논법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의 견고함 때문에 바로 옆에 계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다. 그 견고함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깨뜨리신다.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수 천년을 관통하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마음속에 뜨거움을 느끼고, 그 새로운 인식은 예수님을 다시 알아보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공포스러운 죽음이 곧 임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했던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빠져있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은 지금도 여전히 인간들이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라면 다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비존재를 회피하게 된다 (폴 틸리히). 비존재 (nonbeing) 를 피하기 위해 존재 (being) 를 피하는 것은 중독, 허무주의, 영웅주의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항상 죽음을 기억하되 (Memento Mori), 그 죽음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간다.


2022년 12월 19일 월요일

불안감 (Luke 23)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신의 과오로 인한 결과에 대한 불안감,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갈등과 과중한 업무에 대한 불안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감까지 다양한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물질과 권력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삶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는 자신이 총괄하는 유대지역에서 소요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십자가형을 명했다. 분봉왕인 헤롯 역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지위에 방해가 될 만한 일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판결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다. 빌라도와 헤롯왕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유대지역의 책임자로서 서로 경계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었다. 이 둘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그들 역시 위선적인 율법준수를 토대로 그들만의 종교적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

 

     사람들은 십자가위의 예수님께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기적을 보이라고 외쳤다.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결 해 줄 것으로 보이는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권력이 우상이 되고,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 해 주는 신이 우상이 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불안감을 없애 줄 권력이나 절대적인 신을 원하면서 살아간다.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새언약 (Luke 22)

      세상적인  욕심이 강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적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그들은 많은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모든 관심을 재산 불리기에 집중하며, 동시에 남들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 하고자 한다. 소유한 재산과 지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자원들을 사용하며, 그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언행을 지켜본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스승을 팔아 넘기기도 하고, 자기들 중 누가 큰 자 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제자들의 어머니들은 자기의 아들에게 높은 지위를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까지 했다.  

     세상적 욕심은 소유에 집중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종교적인 노력들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위선적인 태도를 예수님은 계속 지적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 했으며 신성모독으로 고발했다. 자신들의 모든 행위는 정의롭고 올바르며 항상 타인들을 평가절하 하면서, 그들만의 집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고를 고수한다. 제자들 중 실질적인 리더였던 베드로는 세상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른 제자들 앞에서 정의로운 척 하며 자신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율법적 삶은 위선적이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수많은 계약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번번히 계약은 깨지고 말았으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언으로 새 계약을 약속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그 새 계약은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최종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다. 사람들의 세상적 욕심과 율법적 행위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의 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11

부르심의 소망 (로마서 8 18 - 39)

 

A. 고난의 의미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 (8:18); 유대교와 로마에 의한 박해, 모든 창조세계가 함께 고난받으며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해산의 고통; 새창조).

1. 인간의 실존적 모습 - 첫 열매로서 성령을 이미 소유했지만 여전히 새 창조의 완성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긴장상태

2. 소망으로 구원을 받음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1)

3. 성령의 도우심 - 시간적, 공간적인 피조물의 한계와 연약함을 성령이 도우심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심 (8:28)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

 

B. 하나님의 사랑

바울의 질문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8:39)."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실 일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아들의 삶을 본떠 빚으시려고 결정해 두셨습니다. 분의 아들은 분께서 회복시키신 인류의 앞줄에 계십니다. 분을 바라볼 우리는, 우리 삶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 유진 피터슨

 

C.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

-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끝없는 도전들: 입시, 졸업, 군대, 취업, 결혼, 육아, 자녀교육, 직장 등     현대인의 복잡하고 바쁜 삶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지금 성령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어 기도하며 인식해야 한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삶 또한 또 다른 고난의 삶일 수 있다. 선하고 정직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정의로운 선택은 쉽지 않다. 매 순간이 투쟁일 수 있다. 다수가 따르는 방법이 때로는 정의롭지 않을 수 있기에, 용기있는 소수가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은 나의 선한 행동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 의롭다라는 말은 내 속에 죄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몸에 여전히 병원균이 있지만 나의 면역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건강을 유지 하는 것과 같다. 내 속의 죄성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좁은 길로 인도한다.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때 (Luke 2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면서 시작되고 ( 1:1),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1)로 끝맺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다 ( 1:14).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주관하신다. 모든 것에 시작과 마지막이 있듯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제한된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그 마지막이 다가오지 않으리라고 착각한다. 그는 또한 막상 그 마지막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모순된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 제한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려 하며 헛된 우상들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들을 끊임없이 깨뜨리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화 될 때 지성소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성전은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율법이 우상화 될 때 그 율법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우상화된 교황의 권위는 종교개혁을 통해 그 허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우상화되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계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능력과 경제적 가치가 우상화된 현 세상에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고통은 바로 하나님의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상들을 깨뜨리신다.

 

     2000년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암시적으로 예언하셨다. 언젠가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 이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의 제한된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에는 마지막이 있으며, 그 이후 얻게 되는 영생을 통해 새 창조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음을 인식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동행하신다.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통치하시듯, 나의 삶의 처음과 끝에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귀중한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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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