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2일 금요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John 15:1-27)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농부이시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이다. 포도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풍성한 생명과 풍요로운 축복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포도나무에 연결되어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세상의 풍파속에서 그 믿음을 지키면서 버터야 (abide by)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친구되시는 보혜사 성령님 (parakletos)을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보내셔서 그 믿음을 확증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미워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리에 근거한 도그마적인 해법만을 우리에게 준다. 현대인의 삶은 너무나 다양화되어 있고 각자가 처한 문제점들은 획일화된 가르침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선택해서 세상에 두어 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계획하셨다. 세상의 기준으로 맺어지는 열매는 썩어 없어진다. 그러나 하나님 기준으로 맺어지는 열매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거룩함이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열매는 영원히 썩지 않는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그 풍성한 생명이 그대로 나에게 연결된다. 열매 맺음의 첫번째 단계는 생명의 연결이다. 그 다음은 성숙이며 꽃 피움이고 최종적으로 사랑의 열매가 맺힌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참 의미이다.

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John 14:1-31)

    근심과 두려움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창조의 본질과 욕심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극복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1) 인간의 삶은 고난과 더불어 살도록 설계되었다. 즉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일해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자녀를 낳고 기르는 고통을 겪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께 그 수고와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만 기도한다.

 

2) 모든 것 위의 모든 것이 되시는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평범하며 보편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낮아짐과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 절대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으로 오직 특별함만을 추구한다.

 

3) 피조물로서의 한계성을 가진 인간은 결국에는 죽을 운명이며 그 죽음의 비존재성에 굴복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영원히 살것처럼 성공과 부를 끝없이 추구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살고자 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곧 떠나게 됨을 알려주셨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은 근심하고 두려워했다. 다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제자들은 -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 이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옛 삶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 그 떠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근심과 두려움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근심과 두려움의 진짜 원인은 우리의 욕심과 육체의 죽음이다.

 

     고통과 혼돈의 삶을 근심과 두려움으로 살아가며, 거기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며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우리들은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주신다.

2023년 11월 23일 목요일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John 13:1-38)

   신약시대에 찾아온 손님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 집의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종의 위치에서 주인과 손님을 섬기듯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의 모든 옛 계명들을 완성하는 최종적인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종의 자리에서 섬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의 제자들임을 알아보게 된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여전히 구약적 시각으로 우리들은 돈, 명예, 지위, 안정된 삶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상적인 것들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명령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높은 지위에서 군림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우리는 물질적 만족을 누리며 살고 싶어한다. 우리는 섬김받고 싶어한다.

 

     우리들은 여전히 구약적 축복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 모든 것들을 소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이 우리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우리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고 있다.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바리새인들이 보여주었던 잘못된 믿음의 행위들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다.

2023년 11월 14일 화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11

 요한복음 성경공부 11 (8:12-59) 자유케하시는 예수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8:12)

더 이상 어둠의 막다른 길 (no way out under dark)에서 헤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에서 행하신다.

 

A. 인간이 처한 육체적 한계

"너희는 육체 (사람이 정한 기준, human standard)를 따라 판단한다" (8:15)

우리들은 물질적인 한계 (3차원적)의 프레임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이 현상세계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ex) 뉴턴의 물리법칙 -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역학)

 

"우리는 그분에게 육체적인 어떤 것을 감히 부과해서는 안되며 그분을 우리의 감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해서는 안된다" (죤 칼빈, 기독교 강요)

 

유대인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숭배한다.

현대인들; , 명예, 지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숭배한다.

우리의 공허한 정신과 죄성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긴다.

 

B. 인간이 처한 죄의 한계

말에 거하면 - 참 내 제자가 되고 - 진리를 알찌니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2)

말에 거함;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1:1-2), 말씀대로 사는 것

제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12)

진리;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14)

자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위에 은혜 (blessing after another)를 받았다 (1:16)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물 (gift after gift after gift, 메세지, 유진 피터슨)

 

유대인; 율법을 지킴으로 자유할 수 있다고 주장 - 불가능하다

영지주의; 우리의 노력으로 수련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 - 댓가로 얻음

예수님; 예수 (로고스)가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일 때 진리를 알게 된다 - 댓가없이 주어짐

 

유대인들의 자유; 간음한 여인을 율법에 따라 죽일 수 있는 자유

예수님의 자유; 죄지은 여인을 용서하여 살리는 자유

 

C. 인간이 처한 편견의 한계 (유대인의 특권의식)

유대인들의 질문; 당신은 누구요? (8:25),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8:39)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드디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편견 (prejudice, stereotype)을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베이컨 (Francis Bacon, Knowledge is power); 동굴의 우상 (주관적 선입견), 극장의 우상 (무비판적 수용), 종족의 우상 (집단이기주의, 비이성적 신념), 시장의 우상 (언어적 오류, 과장된 상품명)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받은 복을 수동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내가 한 선택이 옳은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갔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성장했는지의 과정들을 의미한다.    

2023년 11월 12일 일요일

하나님이신 예수님 (John 12:12-50)

   구약의 위대한 예언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이미 예언된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이셨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도 이미 이사야의 예언에 계시되었다. 수백년전 이사야는 이미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만, 정작 예수님의 실체를 눈으로 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머리로는 메시야를 알고 있지만 정작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이다. 사람의 영광은 덧없다. 육체의 목숨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영광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간다. 그들의 마음은 무디어져 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게 예수님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계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전할 것이다"  

 

    불순종의 자녀들을 예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우리들은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님 (John 12:1-11)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은 마리아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마리아도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장례를 예비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단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며 예수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수한 마음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귀한 섬김의 행위가 되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예수께 드렸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시며 계시하시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기에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도 일하심을 믿는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힘을 북돋는 격려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선한 영향력을 주변에 끼쳐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하게 살아서 내 의가 드러나고 그 선함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 선한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땅위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마리아의 순종적 행동을 본 유다는 위선적 태도로 비난했다. 많은 무리들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러 몰려들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인기를 질투하여 나사로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관심밖의 일이었다.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 (John 11:1-57)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이적들 중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가장 강력한 임팩트를 유대사회에 주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기적을 행한 이후 어떤 선지자도 보여주지 못했던 기적을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다. 무리들은 열광했고 반대로 유대 지도자들은 더 이상 예수의 행적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유대 민중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심을 예수님은 보여주셨다.

 

    로마의 호위속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던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제거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메시야의 존재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메시야를 기다리고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진짜 메시야를 부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특권의식은 메시야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100% 확신하지 못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께 원망의 말을 하기도 했고,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신 예수님에게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마르다는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악취가 난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했지만, 진정성 있는 믿음의 확신은 갖지 못했다.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믿음의 모습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도전이다.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10

요한복음 성경공부 10 (8:1-11) - 용서하시는 예수님

 

로마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후 박해가 끝나자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은 배교자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 기독교 신앙을 버린 자들)에 대한 '용서' 였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내용 (8)과 예수를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는 내용 (21)은 원래 요한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후대에 필요에 의해 추가되었다. (마가복음 16:9-20 역시 후대에 추가된 내용)

 

첫번째 상황.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음모

1) 이른 아침, 2) 여인 홀로 잡혀 온 상황, 3) 많은 무리들에 의해 현장이 목격된 상황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4) 여인을 굳이 예수님께 데리고 올 필요가 없었다.

 

무리들은 의로움에 가득 차서 율법을 어긴 여인을 예수님께로 끌고 왔다. 타인의 죄를 정죄하면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가증스러운 모습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있다.

 

두번째 상황. 무리들을 물러가게 하신 예수님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예수님은 무리들의 마음 속 깊숙히 살아있는 관대함과 자비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극했다.

여인의 죄만 비난했던 무리들은 자신들의 죄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되면 나는 그 어느 누구도 비난 할 수 없게 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스스로 죄 (드러나지 않는)가 있음을 인식한다. (율법으로는 절대로 의로울 수 없다)

 

세번째 상황. 여인과 마주하신 예수님

"너를 고소하던 무리들은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여인은 무리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용당했다. 그리고 무리들이 모두 물러간 후 홀로 남았다. 그리고 그 홀로 남겨진 자리에 예수님이 계신다. 세상은 나를 철저히 이용하여 죄의 상황으로 몰아간다. 나는 수치심과 죄의식에 빠진 채 홀로 그 세상 한복판에 서 있다. 그 순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신다.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 - 나의 모습 (수치심, 포기, 분노, 죄의식), 가면(persona)을 벗은 온전한 나의 얼굴.

페르소나; 인간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즉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포장된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그 간격이 커지게 되면 신체적, 정신적 문제가 발생한다. (칼 융)

 

네번째 상황. Then what? 한편의 단편소설; 결말을 내지 않고 생각의 여운을 남긴다.

 

예수님은 나에게 물어보신다.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 너는 무엇을 믿느냐? 너는 나를 만나고 있느냐?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자유케하지 못한다. 메마르고 완고한 믿음 

기독교는 신념이 아니다. 비이성적 신념은 폭력적이다. 이기적 소망

기독교는 도덕이 아니다. 선한 삶이 영생을 주지 못한다. 일방적 사랑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본 회퍼)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17:3)"

2023년 10월 6일 금요일

선한목자이신 예수님 (John 10:1-21)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거짓 설교자들에 대하여 요한은 경고하고자 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는 초대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아직 교리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헬라철학을 기반으로 한 영지주의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 주심을 선한목자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강조했다.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어주시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 또한 예수님은 선한목자이기 때문에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 주신다.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선한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선한목자를 아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안다. 안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를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내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내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알고 계시고 소중히 여겨 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해 땅의 영광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일시적인 육체의 생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늘의 축복을 얻기 위해 세상의 축복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람들의 인정을 버려야 한다.

2023년 9월 28일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09

 요한복음 성경공부 09 (7:1-52) -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기독론)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인간이 본질로부터 벗어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죄는 하나님과 소외 (estrangement)된 상태로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연관성을 갖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본질적으로는 소외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복된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며,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믿음의 길 (용기, encourage)이 되어 주셨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른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 (10). 예수님은 나의 존재의 가치를 아름답게 여기신다. '아름답다'에서 '아름' ''를 뜻한다. '본래의 나'의 모습, 또는 ''라는 존재의 본질적 가치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바라 보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의 본질적 모습은 모두 아름답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때 예수님은 내가 잃어버리고,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나의 존재적 본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를 언급한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

나는 생명의 떡이다 (6:48)

나는 세상의 빛이다 (8:12)

나는 양의 문이다 (10:9)

나는 선한 목자이다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1:3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 (15:1)

 

소외된 인간의 근원적인 악; 불신앙 (하나님의 존재 부정), 오만 (자기중심적), 욕망 (불안함)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한다 (7:7)

세상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7:19)

세상은 예수님에게 분개한다 (7:23)

 

예수를 향한 어리석은 표현들 (죄악된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봄)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십시오 (7:4)

이 사람은 공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학식을 가졌는가 (7:15)

당신은 귀신이 들렸소 (7:20)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을까 (7:41)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두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분열이 생겼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삼위일체)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감을 얻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지 안다 (7:17)"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7:28)"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7:38)"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이사야 55)" -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됨

"내가 네 몸에서 나올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서,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삼하 7:12)"

"너 베들레헴아 ---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다 (미가 5:2)"

2023년 9월 15일 금요일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 예수님 (John 9:1-41)

      육신의 눈은 물리적 세상을 보게 해주고 시각적 정보를 제공해준다. 영혼의 눈은 진리를 알게 해주며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잠시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두 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사람들은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두고 누구의 죄인지를 따졌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을 그 소경을 통해 하심을 말해주셨다. 소경이 눈을 뜨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신 것을 문제 삼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 방법에 관심을 가졌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신다.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을 영혼의 눈으로 보았다면,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했다. 한 영혼이 눈을 뜨게 된것을 기뻐하며 그를 격려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지만 진짜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한 그들은 사실상 눈뜬 장님들이었다.

     율법과 제사 그리고 잘못된 종교적 열심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 율법에 얽매인 믿음은 우리들을 강팍하게 만든다. 왜곡된 사랑과 무조건적 순종은 타인에 대한 잔인함으로 표출된다. 하나님을 제대로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영혼의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2023년 9월 5일 화요일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 (John 8:12-59)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 또는 "당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기적을 보이셨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 지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 유대인의 강력한 나라를 재건 해 주는 신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민족적 우월성과 물질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을 예수님은 죄의 종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 죄의 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하며,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주어진다. 그러므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은 바로 나에게 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땅의 것만을 인식하며 물리적으로 가능한 현상의 눈으로 예수님 바라보았다. 그러나 위에서 오신 예수님은 초월적인 영역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죄악되고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물질세계의 한계는 우리의 사고의 영역을 매우 좁게 만들었으며, 그 좁은 사고의 영역속에서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더욱 꼼짝없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열어주셨다. 진리는 우리들을 그 처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게 해준다.


2023년 8월 24일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08

 

요한복음 성경공부 08 (6:22-71) - 로고스이신 예수님

 

"인류의 역사를 보면 0.1%의 창의적 인간과 그것을 알아보고 협력하고 함께 문명을 건설한 0.9%의 안목있는 인간, 1%의 인간 (자기주도적 인간)이 문명을 이끌었다. 나머지 99%의 인간은 비관적, 수동적 자세로 그 문명에 이끌려 갔다 (잉여인간)" - 제레미 리프킨

Jeremy Rifkin;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작가. '엔트로피',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요한복음의 사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무리들

가나 혼인잔치의 손님들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

예수님이 누구인지 물어보는 사람들

베데스다 연못 주위의 사람들

광야에서 말씀을 듣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사람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때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

 

무리들의 질문 (우리의 잘못된 종교관습)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6:28)"

- 맹목적 종교행위, 위선, 자기 의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행하셔서, 우리가 보고 믿게 하시겠습니까? (6:30)"

- 하나님을 시험 (push), 조건적 신앙생활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6:34)"

-  자기 중심적 신앙, 이기심,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족

 

무리들

예수

육의 양식 

생명의 양식

세상의 복 

하늘의 신령한 복 

부유한 세상나라

하나님의 나라

세상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이기적인 신앙; 무리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으로 좋아할 뿐이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 6:26)"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6:27)"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속으로 들어옴 (위로부터의 구원)

- 주도적으로 받아 들이는가 아니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는가?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 (6:65)"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

바울의 해석;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8:30)

 

예수님의 질문;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6:67)

베드로의 대답; 영원한 생명의 말씀 (로고스, logos)이 예수에게 있다 (6:68)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 것; 영생 (eternal life),  죄로부터 자유함 

-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이 우리에게 있다 

- 예수안에 머무르는 것 (in Christ); 성만찬, 묵상,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2023년 7월 31일 월요일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 (John 8:1-11)

      이 사건은 요한이 쓴 복음서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후대에 초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배교자들에 대한 용서의 필요성이 있게 된 후 추가된 내용이다. 이른 아침에 한 여인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오게 되었다. 남자 없이 연약한 여자만 잡혀 왔으며 이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무리들에 의해 미리 계획된 범죄였다. 가련한 여인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들은 세상의 악함에 이용 당하며, 세상의 문화에 휩쓸려 죄를 짓는 약한 존재이다. 여인을 잡아 온 무리들은 이미 십계명을 어겼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아라). 그들은 세상의 악에 대해 그것을 악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며 스스로 의롭게 보이고 싶어했다

 

    악인들은 그들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를 미워한다.

 

     모두가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선포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 (condemn)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 짓지 말아라" 실패하고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고 극복하지 못하며,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우리 모두를 용서하셨다.  

     죄사함 (delete)은 죄인이 죄에 대한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판결의 주체는 제 삼자, 즉 판사나 제사장의 몫이지만, 판사나 제사장은 죄로 인한 피해자가 아니므로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 죄의 용서 (forgive)는 도덕적, 사회적, 관계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기에,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반면 피해자에게 법적인 죄 사함의 권한은 없다. 진정한 죄 사함과 용서의 권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초월적 신성),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와 고통을 체휼하시는 사람의 아들 (인성)이시기 때문이다.

2023년 7월 27일 목요일

요한복음 성경공부 07

 

요한복음 성경공부 07 (6:1-15) - 가장 귀한 가치

 

A. 광야생활   

광야에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모세가 기록한 것이 나를 두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나의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6-47)

구약시대

신약시대

만나, 메추라기 (제한적)

오병이어 (풍성함)

모세를 통한 간접적 공급

예수를 통한 직접적 공급

율법 

영생

가나안

하나님의 나라

금송아지를 숭배한 백성들

예수를 억지로 왕 삼으려는 무리들

 

//;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들에게 의식주의 문제가 발생했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다 (3:17)"

 

정당한 노동과 그 댓가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간의 삶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여전히 인류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며, 농업기술을 통한 식량증산은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의식주를 추구한다 (욕심, 불안, 남과의 비교) - 자기 과시, 자기 , 자기 실현의 결과물로 왜곡; 세속적 문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 

 

예수님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들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훨신 낫다 (6:28-30).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짜 가치; 하나님의 나라, 영생

 

광야에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의식주를 해결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진짜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실체를 원한다.

질문) 나는 예수를 믿는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있기 때문에?

 

B. 시험당하신 예수님

당시 스토아 철학의 영향 - 자신의 운명 (죽음, 가난, 고통 )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긍정적; 삶의 만족, 스스로의 삶을 묵상, 겸손 -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부정적; 불만, 분노, 삶의 본능적 욕구에 집중, 이기적, 수동적 삶의 자세

영지주의는 이러한 운명론적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원의 참지식과 수련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적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왕이 아니다.

 

예수님의 소명적 ; 인류의 구원, 사랑, 새창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위해서는 초월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금식 후에 떡을 만들어 먹지 않았다. 누워 곳이 없었다. 먼길을 걸어서 다니셨다. 자신에게 향한 조롱을 묵묵히 견디셨다. 생명의 위협에도 대응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사명의 완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위해서만 능력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

내 삶에 주어진 것들에 대한 익숙함과 당연함은 그 본래의 소중한 가치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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