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종의 자세로 믿음 (Luke 17)


 

   누구나 큰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믿음의 정도를 양으로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믿음은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병의 나음을 간절히 구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바로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했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 도중에 그들은 그들의 피부병이 완치되었음을 깨닫고 기뻐했다. 그들 중 단 한 명만 예수께 돌아왔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열명중 한 명,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돌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격리되어 살던 피부병 환자는 그 병이 나았을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이 깨끗하여 졌음을 보인 후 제사장의 허가를 받고 다시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 예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병은 아마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나음을 확인받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당연한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했다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았다.

     누구나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러나 고난은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명의 나병환자들 처럼 단지 육체의 병의 나음에 기뻐하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 것에 만족한다면 그 고난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다.  

     믿음은 물질을 소유하듯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받은 은혜를 묵상하고 그 은혜가 거저 주어졌음을 인정하며, 낮은 종의 자세로 그 은혜의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다. 세상에서의 삶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이미 임했음을 아는 자는 진짜 복된자이다.

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서로 나누는 은사 (Luke 16)


   

   주인의 돈을 맡아 보던 한 종은 자신이 저지른 비리로 인해 청지기 직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원래 유대 율법에는 같은 유대인을 상대로 돈을 빌려 줄때 이자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신명기 15, 23), 그 돈을 관리하던 종들이 암묵적으로 이자를 중간에 받아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청지기는 자신이 받아 오던 이자를 모두 면제해 준 후 주인에게 돌려줄 원금만을 받도록 모든 증서를 고쳐서 작성했다. 결과적으로 주인은 율법을 어기지 않은 채 원금을 모두 돌려 받았고,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이자를 감면해 준 종에게 고마와 했고, 주인은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자신의 종을 칭찬했다.  

   종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도록 지혜를 짜냈다.

     세상의 불법적인 재물에 대해서도 이렇게 모두에게 이득이 나누어 질 수 있게 지혜를 짜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우리도 이러한 지혜를 본 받아야 함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고 의롭다 칭함받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각기 다른 은사 (gift)를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그 은사를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의 가치를 물질적으로 세어보며 혼자 누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만이 율법의 이득을 독점하려고 했다. 물질의 은사를 받았던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에게 그 은사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혹은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또 다른 이는 목사와 교사로 ( 4:11) 각자의 은사는 모두 다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서로 나눌 때 우리 모두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 맺히게 된다.

2022년 10월 20일 목요일

성숙한 자의 관용 (Luke 15)


   

   목자와 양떼는 푸른 초장과 물가를 찾아 몇일동안 들판을 돌아다니기에 들짐승들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있다. 때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 10:11).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목자는 99마리의 양떼를 들판에 놔둔채 길을 떠났다.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양으로 인해 목자를 잘 따르는 99마리의 양들은 한참 동안을 목자 없이 위험한 들판에 있어야 했다. 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낸 후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아직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상속된 재산을 미리 받아서, 먼 나라로 떠나 그 재산을 다 탕진한 둘째 아들은 비난 받아 마땅한 삶을 살았다. 반면에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몫까지 감당하며 선하게 살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목자의 인도를 잘 따랐던 양들은 위험한 들판에 남겨졌고,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큰 아들은 집에 남아 열심히 일했다. 남은 자들이 오히려 목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위험에 처했고, 남은 자들이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채 묵묵히 일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남은 자들 (the remnants)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그 남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들은 미성숙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관용을 가져야 한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후 보여준 첫째 아들의 잘못된 태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숙한 자의 완성된 모습은 바로 관용임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신다.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미성숙한 한 사람으로 인해 다수의 선한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그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공정하게 법이 집행되기를 다수의 사람들은 바라며, 그것을 정의롭다 (righteous)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사람을 위해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진정한 의 (righteousness)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나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들판에 남겨진 성숙한 양인 동시에, 선한 목자가 절실히 필요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22년 10월 16일 일요일

취소되지 않는 잔치 (Luke 14)

    

    하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 어 실행해 오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으며, 지금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계신다. 그 중심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곳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잔치의 자리이다. 하나님은 그 잔치의 자리에 우리들을 초대하신다. 그 귀하고 영광된 자리의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잔치에 참여한다. 그곳에서는 베푸는 자와 초대 받은 자가 만난다. 기쁨과 풍성함이 있으며, 교제가 이루어진다. 초대 받은 자는 자신을 초대한  주인에게 감사하며, 그 호의를 존중하여 기꺼이 그 잔치에 참여한다. 베푸는 자는 최선을 다해 잔치를 준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큰 잔치의 자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적 염려와 욕심으로 인해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밭을 샀기에 가서 보아야 하고, 어떤 이는 소를 시험해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장가를 가서 아내를 맞이 하여야 하기에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 그 잔치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며 잔치에 참석하지 못함을 정당화 한다. 초대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취소되거나 연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차별받던 가난한 자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며, 아무 관련이 없던 큰 길에 있던 사람들까지 억지로 그 잔치에 모여들게 된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곳

     초대받은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 않고, 초대받지 못했던 자들이 오히려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이 모순적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곳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되는 곳이다 (20:16).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면 하늘나라가 바로 내 앞에 있어도 알아 보지 못한다. 내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항상 겸손하며 낮은 자리에 앉기에 힘써야 한다.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2년 10월 12일 수요일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Luke 13)

 

     세상의 불행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도, 일평생을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불행은 다가온다. 그러므로, 억울한 죽음, 육신의 질병, 선천적 장애, 사업의 실패 등 수많은 어려움들의 원인을 죄의 결과라고 결론 짓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들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의 불행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죄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진짜 죄의 결과는 영적 죽음이다. 회개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않는 삶이다.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잘려나가면 일시적으로는 살아 있을 수 있어도 결국에는 말라 죽고 만다. 말라 죽어버린 나뭇가지는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의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이다. 안식일에 등 굽은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비난한 회당장은 고통 당하는 자에 대해 공감 (sympathy)하지 않았다. 자비를 잊어버린 율법은 사람들을 얽어매는 갈고리가 된다.  

      인내와 겸손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열매를 맺는 자는 인내하며 (겨자씨의 비유), 겸손하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 길은 고난을 자초하는 길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불행을 두려워한다. 헤롯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이 다가오니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말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세상의 불행에 굴하지 않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 (maxim)을 끝까지 지킨다.  

2022년 10월 10일 월요일

가슴 떨리는 두려움 (Luke 12)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는 기억의 상처로 우리를 무섭게 짓누른다. 현재 이루어 내야 하는 성과와 주어진 과제들 또한 우리를 억누르는 두려움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과 나의 존재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두려움 (존재감의 상실)도 우리를 어둡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홀로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낀다 (군중속의 고독). 미래의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의 삶의 즐거움을 포기한 채 모든 노력을 다해 재물을 모은다.  

     두려움은 우리를 무섭게 짓누른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포심을 안겨준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지나친 염려우리 세상의 무한경쟁 속으로 내몰아버리며, 우리의 관심은 오직 생존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세상적 걱정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태도이다. 우리는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도 더할 수 없으며 (6:27),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아 놓아도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아 가신다. 우리의 생명은 염려함으로 더 늘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화도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며, 공중의 새도 하나님이 먹이심을 우리는 매일 보면서 살아간다

     소망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용기

    우리는 진짜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 두려움은 막연한 세상적 두려움과 다르다. 예수님이 앞서서 보여주셨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가르쳐 주었던 소망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용기 (폴 틸리히)이며, 가슴 떨리는 두려움이다. 우리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한 소유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 때를 따라 주어지는 은혜를 간구하며, 세속의 문화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러한 용기로 인해 때로는 분열과 갈등, 심지어 가족안에서도 서로 맞서는 일이 생길 수 있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과 행동을 인도하신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의 실체이시며, 우리는 그 증인이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 2:12). 

2022년 10월 6일 목요일

간결한 진리의 메시지 (Luke 11)

   


  

     예수님의 메시지는 항상 간결했고, 비유의 형태로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 혹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쉽게 설명 해 주셨다. 그리고 어떻게 삶에서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11:28).  

      마음속의 어두움은 진리의 빛을 거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말씀보다는 표적을 구했다. 병 고침과 여러 번의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 지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의 어두움은 진리의 빛을 분별하지 못하며, 때로는 거부한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 역시 진리의 빛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움 속에 빠져 있었다. 바리새인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했지만, 정의와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은 소홀히 했다. 율법학자들은 올바른 율법의 정신을 유대인들에게 전해야 했고, 삶에서 그것들을 실천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율법조항들을 만들었고, 그 율법준수의 무거운 짐을 강제로 지우면서,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율법은 스스로의 기득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했으며, 예수님은 그 피에 대한 책임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선포했다.  

    우리는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율법학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율법적으로 정죄하며 스스로가 옳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복되다고 착각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로 우리들에게 경고하신다. 우리가 오직 구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그 분의 나라이며, 일용할 양식 뿐이다.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 하며 시험에 들지 않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이 간결한 진리의 메시지는 2000년이 지난 지금 바로 나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2022년 10월 3일 월요일

하늘에 기록된 이름 (Luke 10)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셨다. 그들은 가는 곳 마다 평화를 전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굴복시켰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어느 집에 가든지 평화를 빌어 주었고, 그 집에 머물며 주는 것을 먹고 마셨다. 그들의 메시지와 전도방법은 어린아이들 처럼 매우 단순했으며 순수했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보는 눈과 그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복된 사람들이었다. 승리의 기쁨에 넘쳐 돌아온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진심으로 기뻐했다

     전도는 평화를 전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업적과 성과를 보며 기뻐한다. 교회내에서 교인들은 수많은 종교적 활동들 (헌금, 집회참여, 봉사 등)의 성과물로서 주어지는 칭찬과 자기만족 그리고 직책에 목말라 한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 놓은 것 같은 수많은 자기 의로움이 너무나 자랑스럽지만, 정작 그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한 율법 교사는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고 싶어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율법의 정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 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고 싶어했다. 내 삶 전체에서 내가 이루어 낸 것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것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은 것들 뿐이다.  

    

     하나님은 내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 준비하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위해 생명나무까지 준비하셨으며 ( 3:22), 예수님을 통해 영생의 길을 허락하셨다 ( 3:16). 내가 내세우고 싶어하는 나의 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마르다처럼 분주하게 살아가며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고 있다. 스스로의 의를 쌓기 위해 많은 일을 하면서 염려하며 사는 삶의 결국은 허무뿐이다.  

2022년 10월 1일 토요일

예수님의 실체 (Luke 9)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 병을 고쳤으며, 오천 명을 먹이셨고, 악한 귀신을 꾸짖으셨다. 사람들은 그 말씀과 능력의 위엄에 놀랐고,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유대지역의 통치자였던 헤롯왕 역시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서 몹시 당황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들 나름대로 예수가 누구인지 추측했다. 어떤 이는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났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유대인들에게 엘리야는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지자중의 선지자였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가장 두려워 했으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그의 세례를 받고자 했을 정도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반응에 매우 고무되었으며, 어느 날 자기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의 문제로 다툼이 발생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곧 높은 자리를 차지 할 것으로 믿었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도 함께 세상적인 성공을 맛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생각한다.

 

    세상의 논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한다. 말씀을 듣고, 능력을 받고,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도 자기 스스로를 높이 세우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을 따르면서, 자신도 함께 위대해지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 역시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같은 작은 자들을 영접해야 하며, 예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입술의 유일한 고백은 바로 이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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