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 목요일

부활하신 그리스도 (Matthew 28)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소명을 끝내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위대한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하심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소망의 실체를 직접 보여 주셨다. 내가 죽고 구원받아서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주셨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착하고 선하게 살면, 죽어서 영원히 복을 받고 다시 환생하거나, 좋은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종교는 단지 인간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며 세상을 사랑하신다. 우리의 몸과 영이 어디에 있든지 내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 바로 은혜의 장소가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소망의 실체가 되셨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이 죽음으로 인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죽음이 두려워 일평생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다고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이웃을 도와주고 기도하며 살아간다. 육신의 기운이 달려 죽음에 이르더라도 영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 소망의 실체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그 소망을 붙잡고 오늘을 살아가는 자는 가장 복된 사람이다.

2022년 3월 29일 화요일

내 안의 그리스도 (Matthew 27)

 


 

무리는 언제나 흔들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찬양했던 바로 그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언제나 기적과 표적을 요구한다. 자신들의 눈과 귀를 경이롭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그 무엇을 예수님께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 믿겠다고 한다

대제사장과 종교 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비롯한 구약 성경을 매일 공부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구약적 의미의 물질적 축복이 자신들에게만 집중되기를 원했다. 가난한자, 소외된 자, 일반인들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로마의 통치 세력들은 예수로 인해 민란이 나거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주의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고, 점령지의 식민 백성들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예수님은 바로 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셨고, 나 역시 이 모든 사람들중 하나이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요구대로 스스로를 구원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걸어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예수님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2022년 3월 28일 월요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Matthew 26)

 


새 언약은 예레미야에 의해 예언 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었다. 율법에 의한 불완전한 죄사함의 시대가 끝나고, 죄의 완전한 용서와 영생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죄사함을 위해 매번 새로운 제물을 드려야 했으며, 제사장을 통한 간접적 예배를 드려야 했다.  

 

율법은 묵상의 대상이 아닌 삶을 얽어 매는 도구였으며, 신분과 처지에 따라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전은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터전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율법이 가진 제한성과 불완전함은 이제 끝났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다. 율법의 원래의 목적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의 표현이었다. 그 율법을 즐거워 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을 강조하며 형식적이고 인위적인 율법의 해석을 거부했기에, 대제사장과 종교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렸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로마 법정에 세웠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 언약이 세워지기 위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국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인간의 노력과 지혜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

2022년 3월 24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02

 2. 인류의 비참한 타락 (로마서 1 18 - 2 1)

 

A. 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스스로 타락을 택한 인류)

 

바울은 로마의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에게 죄의 문제를 언급하며 로마서를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인류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 (죄의 보편성, 인간의 죄로 인한 세상의 타락)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18):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포함한다.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만물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났다. (20):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핑계를 댈 수 없다)

 

현 인류의 상태를 묘사하며 인류 전체가 죄에 빠져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1) 경건치 않음과 불의거룩한 삶의 포기 (consecrate)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 의 목적 상실 (goal of life)

3) 감사하지 않음 묵상의 부족 (meditation)

4) 허망한 생각 (nonsense)과 미련한 마음(empty mind) – 가치관 상실

5) 스스로 지혜있음 자기 합리화, 상황윤리 (self-justification, rationalization)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었다 (23) -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만들어버린 인간 (우리는 우리의 원함 -, , 권력- 을 하나님이 이루어 주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   기도해야 한다)

 

B. 죄를 내어버려 두시는 하나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심 (24)

-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심 (성욕-육체적쾌락, 식욕-소유욕, 수면욕-편안함의 추구)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심 (26); 불명예,치욕,수치 (shameful passion)

- 동성애  (구체적인 타락의 예); 창조의 목적과 질서에 어긋남을 지적한다.

  쥬비날(Juvenal);로마에서 빈곤이 사라진 후 범람한 것은 온갖 죄와 음란이었다”.

  세네카;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 일이냐고 묻지않고 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심 (28) – 하나님과 스스로 단절

-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사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 수근수근, 비방,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 부모 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창조질서에 어긋난 행위들 (1-3): 우리들은 이 죄악들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하느니라 (32)”--> 해결책이 필요하다!

 

바울의 의도> 구약의 사건들을 연상시키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계약을 상기시킴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꿈: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동성애와 죄악을 언급: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여리고성, 가나안 멸망

유대인들의 가장 큰 죄: 자기 의 (self-righteousness), 이방인들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함

 

질문>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

믿음과 삶 (Matthew 25)

 


믿음과 삶은 함께 간다.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른 은사를 주신다. 보기에는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 은사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는지를 보신다.  

 

삶 속에서 믿음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온전히 나의 의를 위해서만 사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의 만족과 나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용서를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의 잘됨이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라고 착각하게 되며 그러지 못한 자들을 무시한다.  

 

주인에게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능력을 인정받은 종들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그 돈을 두배로 늘려 주인의 재산을 늘어나게 한 종들은 칭찬을 받았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능력이 있음에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인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주인은 종들이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열심히 일하기 원했다."

 

하나님은 일생 동안 우리들이 믿음의 모험을 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물질적인 성과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나타나는 삶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찌하든 하나님을 알아가며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신다.

축복의 날 (Matthew 24)


   

세상은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끝없이 발생하는 민족과 국가간의 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륜 배반적 범죄들이 그 증거이다. 의롭게 살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움을 받는다. 사람들 간의 경쟁은 더 심해져서 서로 물고 뜯으며 싸운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다. 악은 점점 더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파멸을 일으키고 사랑은 없어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어찌할 수 없은 상황들을 온 몸으로 견디며 살아야 한다. 수동적인 견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살아가야한다. 세상과 반대로 살아가야 한다.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잘 사는 것이다. 손해보고 있다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있다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면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반대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대했다. 예수님은 긍휼하심을 갖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했다. 자신의 소명에 끝까지 헌신했다. 모든 세상이 예수님을 경멸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걸어 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환란의 날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 심판의 날이 온다고 예수님이 경고하셨다. 그러나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 하는 사람들에게 그날은 최고의 축복의 날이 될 것 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있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공평,긍휼,헌신 (Matthew 23)

  

모든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완벽해질 수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인해 완벽하고 의롭게 살고 있다고 여겼으며, 그 잘못된 착각은 다른 사람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했다. 또한 이 착각은 스스로를 가식적으로 만든다. 애초부터 완벽하지 않은 율법의 한계로 인해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그 결과는 종교적 패션 쇼였다. 그들의 배타적 구원관, 자비없음, 그리고 잘못된 종교적 열심은 결국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종교적 이중성의 결과는 종교적 패션 쇼일 뿐이다."

 

율법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삶에서 구체화 시키는 것은 공평과 긍휼과 헌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에게나 임해서 그들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믿음이 적은 자들, 즉 애통하는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축복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공평과 긍휼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헌신이다. 이 헌신은 용기있는 태도이며, 비록 온전치 못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삶을 살아가는 믿는 자의 도리이다. 이 세 가지 율법의 기초는 우리들을 올바른 삶으로 인도한다.

2022년 3월 9일 수요일

축복의 가치 (Matthew 22)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초대받는다. 그러나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다르다. 그 나라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다. 아무 복장이나 입고 잔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은 입구에서 쫓겨난다. 그 축복의 가치를 알고 가치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요구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어떤 것에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끝없는 경쟁과 욕심에 사로잡힌다. 잔치에 초대 받았지만 집에 일이 있어서, 밭에 나가 일해야 해서 그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세상일에 촛점이 있기에 진짜 참된 축복의 길에 관심이 없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허락되지 않았던 우리들이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세상의 헛된 것 대신에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계명,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온 몸으로 실행 하셨다. 말씀과 거룩의 훈련, 이웃에 대한 관대함과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2022년 3월 3일 목요일

모든 믿는 자 (Matthew 21)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1:16).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신체적 장애와 병은 그 자신과 조상들의 죄로 인함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었고, 부정한 이미지로 인하여 성전출입과 사람들과의 접촉이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절기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죄의식과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은 그들의 삶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고쳐 주셨고, 고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 또한 고침을 받고 나음을 입은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인 후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병자이며 죄인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으셨고, 율법의 불완전한 부분들을 완성하고자 하셨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병자이며 죄인이다. 단지 율법의 시각에서 그 병과 죄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불완전한 율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포할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임하며 어떠한 경계나 제한이 없다. 예수님은 그 무한하신 하나님 사랑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기를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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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옛 계명들은 그 원래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 믿음의 크기로 서로 비교와 정죄함 때문에 예수님으로 부터 꾸짖음의 대상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