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진짜 가치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물질적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한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돈으로 고급 포도주를 살 수 있지만, 기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맛있는 빵을 살 수 있지만, 맛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깨끗한 물을 살 수 있지만, 영원한 생수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향 좋은 에스프레소를 살 수 있지만, 삶의 여유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명품 시계를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큰 집을 살 수 있지만, 화목한 가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매력 있는 이성 (여성, 남성)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지만, 깊은 잠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권위있는 의사를 살 수 있지만,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비싼 보험을 살 수 있지만, 안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효능 있는 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안락한 의자를 살 수 있지만, 편안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흠 없는 소나 양을 살 수 있지만, 죄 사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일등석 항공권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고급 정보를 살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비밀을 살 수는 없다.


2022년 12월 24일 토요일

비존재 (Luke 24)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셨고, 이전과 똑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 수 없다. 따라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다' 라는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헬라철학의 핵심 논리이다.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의 개연성이다. 시간은 물론 공간까지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삼단논법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의 견고함 때문에 바로 옆에 계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다. 그 견고함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깨뜨리신다.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수 천년을 관통하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마음속에 뜨거움을 느끼고, 그 새로운 인식은 예수님을 다시 알아보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공포스러운 죽음이 곧 임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했던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빠져있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은 지금도 여전히 인간들이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라면 다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비존재를 회피하게 된다 (폴 틸리히). 비존재 (nonbeing) 를 피하기 위해 존재 (being) 를 피하는 것은 중독, 허무주의, 영웅주의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항상 죽음을 기억하되 (Memento Mori), 그 죽음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간다.


2022년 12월 19일 월요일

불안감 (Luke 23)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신의 과오로 인한 결과에 대한 불안감,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갈등과 과중한 업무에 대한 불안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감까지 다양한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물질과 권력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삶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는 자신이 총괄하는 유대지역에서 소요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십자가형을 명했다. 분봉왕인 헤롯 역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지위에 방해가 될 만한 일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판결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다. 빌라도와 헤롯왕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유대지역의 책임자로서 서로 경계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었다. 이 둘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그들 역시 위선적인 율법준수를 토대로 그들만의 종교적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

 

     사람들은 십자가위의 예수님께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기적을 보이라고 외쳤다.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결 해 줄 것으로 보이는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권력이 우상이 되고,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 해 주는 신이 우상이 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불안감을 없애 줄 권력이나 절대적인 신을 원하면서 살아간다.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새언약 (Luke 22)

      세상적인  욕심이 강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적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그들은 많은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모든 관심을 재산 불리기에 집중하며, 동시에 남들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 하고자 한다. 소유한 재산과 지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자원들을 사용하며, 그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언행을 지켜본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스승을 팔아 넘기기도 하고, 자기들 중 누가 큰 자 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제자들의 어머니들은 자기의 아들에게 높은 지위를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까지 했다.  

     세상적 욕심은 소유에 집중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종교적인 노력들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위선적인 태도를 예수님은 계속 지적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 했으며 신성모독으로 고발했다. 자신들의 모든 행위는 정의롭고 올바르며 항상 타인들을 평가절하 하면서, 그들만의 집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고를 고수한다. 제자들 중 실질적인 리더였던 베드로는 세상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른 제자들 앞에서 정의로운 척 하며 자신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율법적 삶은 위선적이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수많은 계약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번번히 계약은 깨지고 말았으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언으로 새 계약을 약속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그 새 계약은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최종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다. 사람들의 세상적 욕심과 율법적 행위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의 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11

부르심의 소망 (로마서 8 18 - 39)

 

A. 고난의 의미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 (8:18); 유대교와 로마에 의한 박해, 모든 창조세계가 함께 고난받으며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해산의 고통; 새창조).

1. 인간의 실존적 모습 - 첫 열매로서 성령을 이미 소유했지만 여전히 새 창조의 완성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긴장상태

2. 소망으로 구원을 받음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1)

3. 성령의 도우심 - 시간적, 공간적인 피조물의 한계와 연약함을 성령이 도우심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심 (8:28)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

 

B. 하나님의 사랑

바울의 질문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8:39)."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실 일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아들의 삶을 본떠 빚으시려고 결정해 두셨습니다. 분의 아들은 분께서 회복시키신 인류의 앞줄에 계십니다. 분을 바라볼 우리는, 우리 삶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 유진 피터슨

 

C.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

-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끝없는 도전들: 입시, 졸업, 군대, 취업, 결혼, 육아, 자녀교육, 직장 등     현대인의 복잡하고 바쁜 삶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지금 성령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어 기도하며 인식해야 한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삶 또한 또 다른 고난의 삶일 수 있다. 선하고 정직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정의로운 선택은 쉽지 않다. 매 순간이 투쟁일 수 있다. 다수가 따르는 방법이 때로는 정의롭지 않을 수 있기에, 용기있는 소수가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은 나의 선한 행동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 의롭다라는 말은 내 속에 죄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몸에 여전히 병원균이 있지만 나의 면역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건강을 유지 하는 것과 같다. 내 속의 죄성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좁은 길로 인도한다.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때 (Luke 2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면서 시작되고 ( 1:1),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1)로 끝맺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다 ( 1:14).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주관하신다. 모든 것에 시작과 마지막이 있듯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제한된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그 마지막이 다가오지 않으리라고 착각한다. 그는 또한 막상 그 마지막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모순된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 제한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려 하며 헛된 우상들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들을 끊임없이 깨뜨리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화 될 때 지성소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성전은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율법이 우상화 될 때 그 율법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우상화된 교황의 권위는 종교개혁을 통해 그 허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우상화되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계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능력과 경제적 가치가 우상화된 현 세상에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고통은 바로 하나님의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상들을 깨뜨리신다.

 

     2000년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암시적으로 예언하셨다. 언젠가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 이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의 제한된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에는 마지막이 있으며, 그 이후 얻게 되는 영생을 통해 새 창조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음을 인식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동행하신다.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통치하시듯, 나의 삶의 처음과 끝에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귀중한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2022년 11월 20일 일요일

하나님의 것 (Luke 20)

      포도원의 비유에는 주인인 지주, , 그리고 소작농인 농부 등 모두 세 신분 계층이 등장한다. 당시 농부는 국민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부분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못했기에 수확한 작물중 상당한 양을 매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종은 주인의 사무적인 일을 담당하는 계층이었으며, 신임을 받은 종의 경우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까지 할 수 있었다. 종은 충성을 다해 주인을 섬겼고, 때로는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주인과, 종 그리고 농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흔히 지주와 소작농 또는 종의 관계를 착취와 억압의 구조로 보기 쉽다. 그러나 책임있는 지주는 소작농의 권리와 재산을 외부로부터 지켜 주며, 재난으로 인한 흉년의 때에는 오히려 자신의 창고를 열어 식량을 제공 해 주기도 했다.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었던 요셉이 통치하던 시기에 몇년간 가뭄이 지속되자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소작농이 되었고, 요셉은 보관하고 있던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원래 지주, , 농부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협력의 구조였고, 만약 이러한 관계가 악용될 것을 대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희년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욕심 많은 주인, 충성되지 못한 종, 그리고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농부들은 이 협력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관계 단절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다.

 

    오랫동안 포도원을 떠나있는 주인으로 인해, 소작농인 농부들은 마치 자신들이 주인인듯 착각했고,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은 나머지 소출을 받기 위해 온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렸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관계 단절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소외와 분리이며, 죽음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은 건축자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 그 굳건한 반석위에 예수님은 자신을 버린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 그로 인해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2022년 11월 15일 화요일

위험을 감수하는 삶 (Luke 19)


    사람들은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일상을 원하며, 그러한 삶을 위해서 어느 정도 물질이 필요하기에, 노동을 통해 삶의 자원을 얻는다. 문제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한정된 물질을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로 변해 버렸다. 삭개오는 그 경쟁을 통해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자신의 부를 축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정말 귀한 것 - 사랑, 희생, 인내, 자비 등 -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 보이지 않는 귀한 가치의 정점에 영생이 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을 잡은 자나 일반 민중들이나 모두 막연하게나마 영생을 갈망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마음 깊숙한 곳에 절대적 존재에게 회귀하려는 본질적 소망을 갖고 있으며, 소망의 궁극적 목적지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그 하늘 나라의 실체를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허락하셨다

 

     영생은 가장 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영생의 선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이며, 빚진 자에게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안정되고 편안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삶 속에는 고난과 실패가 있으며, 인내와 무한한 희생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나라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그 믿음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삶은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한다.

 

     삭개오의 삶은 안전함을 최대한 추구하는 세속적인 삶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영생의 삶으로 변화했다. 한 므나의 은화를 받은 종은 그 위험을 감수하며 이득을 남겼지만, 그러지 못한 종은 있는 것조차 빼았겼다. 위험을 감수하며 믿음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은혜로 주어진 영생의 삶은 우리에게서 멀어질 수 있음을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2022년 11월 7일 월요일

순수한 소망 (Luke 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 당시 민중들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익숙한 것들 -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들, 무화과나무, 병든 사람, 부자, 거지, 씨앗, 누룩, 잔치, 포도주 등-을 예로 들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삶과 멀리 떨어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셨다. 절대적 진리는 우리의 일상의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자였던 어린 아이들 같이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정해진 세속적 사회의 규범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그러한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런 편견도 없이 쉽게 친구들을 사귀며, 기존의 사고방식이 없기에 창조적인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낸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물질관과는 전혀 다른 경제관념을 갖고 있으며, 자신에게 돌아 올 어떠한 이득을 생각하지 않은 채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뛰어다니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몸으로 배운 것들을 습득하면서 성장한다.  

  어린 아이는 세속적 사회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다. 그는 부자였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지켰음을 강조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당시 유대사회가 정해 놓은 엄격한 사회적 규범을 철저하게 지켜왔지만 예수님이 제시한 영생의 길을 따르지 못했다.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그에게는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속의 삶에 집착하고 있기에 진짜 삶을 살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은 우리에게도 있다. 영생의 진리는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는 그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지만, 세상의 염려와 걱정은 우리에게 장애물로 작용한다. 미사려구를 동원해 여기에 진리가 있다, 저기에 진리가 있다고 우리의 입맛에 맞게 외치는 거짓 선동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한다.  

 

  세상의 염려와 걱정은 진리로의 길을 방해한다.

 

     세속의 규범을 따르지 않는 어린 아이들 처럼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소망이 우리를 진짜 삶으로 인도한다.

2022년 11월 3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10

10. 새로운 형태의 율법; 생명의 성령의 (로마서 8 1 – 17)

  

바울의 최종 선언

 

So,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3:9-10)

But now,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3:21).

Therefore,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8:1)

- 나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 때문에

-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들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에 (8:2)

-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과 성령안에서 행하셨기 때문에 (8:3)

-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성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에 (8:4)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을 죄를 인식하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그 죄는 용서받았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의와 거룩으로 이끈다. 이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간다.  "너희도 거룩하라 (레위기 11)."

 

생명의 성령의 법

죄와 죽음의 법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

생명과 평화

죽음, 적대감 

하나님께 빚진 자 (속량)

육신에 빚진 자 ()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음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

노예의 영

 

복음의 핵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하나님)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 자기의 아들 죄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 따라 사는 우리에게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완성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8:3-4)

 

번제; 동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 예배때 드려지는 일반 제사 (Holocaust, 아벨)

소제; 곡식을 드리는 제사로 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일반 제사 (가인)

화목제; 특별한 서원이나 감사를 표현할 때 드리는 제사

속죄제; 알지 못하거나 (잘못이란 사실을 모른 ) 본의 아니게 저지른 죄

속건제;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잘못 사용하거나, 계명을 어겼을 때, 신실하지 못한 죄

 

하나님의 자녀 (영생의 선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1:12)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한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 8:16-17)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음; 그리스도의 세상 통치에 참여 (하나님의 나라)

2.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고난)

3.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자; 은혜로 받은 구원이기에 은사를 나누어야 한다 (의무)

2022년 11월 1일 화요일

볼 수 없는 것을 소망함

    우리는 알지 못하면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다. 평생을  눈먼 자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뜨게 되면 사과를 보아도 사과인 줄 모른다. 정상인들도 사과와 똑같이 생긴 모형사과를 구분할 때는 향기 (후각)나 만져봄 (촉각)을 이용하며, 그 감각은 선험적 (a priori) 으로 이미 습득했던 것들이다. , 사과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한 모든 감각들 (시각, 후각, 촉각, 미각)이 이미 나의 인식속에 경험 되었기에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게 된다. 또한 색깔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물체의 색을 구별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 질문 이전에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물론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절대자를 알고 인식하게 될 때 (감각과 오감으로), 비로소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즉 그 존재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다 (20:29) 고 가르치셨으며, 바울 사도 역시 로마서 8 24절에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인식의 우선성은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에도 적용되는데, 빛을 파동으로 인식하면 파동으로 존재하며, 빛을 입자로 인식하면 입자로 존재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했으며, 하나님은 "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했다. 이 대답의 의미는 하나님은 존재 (완전성)시며, 인간은 존재가 아닌  불완전성을 가진 피조물, 즉 존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전체를 포함하며, 규정할 수 없는 바다와 같으며, 무한하시고, 불가시적이기에 인간의 제한된 이성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피조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만물 (존재자)이 주 (존재)로부터 나오고 주 (존재)께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언젠가 우리 눈에서 수건이 벗어지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날을 소망하며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 (고전 13:12-13).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에게 보인다.

2022년 10월 29일 토요일

종의 자세로 믿음 (Luke 17)


 

   누구나 큰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믿음의 정도를 양으로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믿음은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병의 나음을 간절히 구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바로 고쳐주지 않았다. 대신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했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 도중에 그들은 그들의 피부병이 완치되었음을 깨닫고 기뻐했다. 그들 중 단 한 명만 예수께 돌아왔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열명중 한 명,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돌아왔다.

      율법에 의하면 격리되어 살던 피부병 환자는 그 병이 나았을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이 깨끗하여 졌음을 보인 후 제사장의 허가를 받고 다시 마을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다. 예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병은 아마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나음을 확인받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율법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당연한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했다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았다.

     누구나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으로 부터 자유롭고 싶어한다. 그러나 고난은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믿음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명의 나병환자들 처럼 단지 육체의 병의 나음에 기뻐하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한 것에 만족한다면 그 고난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없다.  

     믿음은 물질을 소유하듯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가 받은 은혜를 묵상하고 그 은혜가 거저 주어졌음을 인정하며, 낮은 종의 자세로 그 은혜의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다. 세상에서의 삶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이미 임했음을 아는 자는 진짜 복된자이다.

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서로 나누는 은사 (Luke 16)


   

   주인의 돈을 맡아 보던 한 종은 자신이 저지른 비리로 인해 청지기 직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원래 유대 율법에는 같은 유대인을 상대로 돈을 빌려 줄때 이자를 받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신명기 15, 23), 그 돈을 관리하던 종들이 암묵적으로 이자를 중간에 받아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청지기는 자신이 받아 오던 이자를 모두 면제해 준 후 주인에게 돌려줄 원금만을 받도록 모든 증서를 고쳐서 작성했다. 결과적으로 주인은 율법을 어기지 않은 채 원금을 모두 돌려 받았고,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돈을 빌렸던 사람들은 이자를 감면해 준 종에게 고마와 했고, 주인은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자신의 종을 칭찬했다.  

   종은 모두에게 이득이 되도록 지혜를 짜냈다.

     세상의 불법적인 재물에 대해서도 이렇게 모두에게 이득이 나누어 질 수 있게 지혜를 짜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우리도 이러한 지혜를 본 받아야 함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고 의롭다 칭함받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각기 다른 은사 (gift)를 선물로 주셨다. 그러나, 그 은사를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의 가치를 물질적으로 세어보며 혼자 누리려는 사람들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자신들만이 율법의 이득을 독점하려고 했다. 물질의 은사를 받았던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구걸하던 나사로에게 그 은사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 혹은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또 다른 이는 목사와 교사로 ( 4:11) 각자의 은사는 모두 다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며, 각자가 받은 은사를 서로 나눌 때 우리 모두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가득 맺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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