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8일 수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09

9. 인간이 처한 실존의 문제 (로마서 7 1 – 25)

 

철학적 질문: 인간은 존재하는가? 보편타당한 진리는 무엇인가? 인간의 이성은 선과 악을 구분할 있는가? 인간은 의지적으로 육체적 한계를 극복할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의 사고와 지식, 경험으로는 완전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없다. 인간에 의한 신의 존재 증명은 무의미하며 불가능하다 (칸트).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지혜를 의심하느냐?" (욥기 38:2)

Who do you think what you are? You disagree my plan without any knowledge.

 

율법은 오직 죽을 육체에만 지배력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 율법은 이상 나를 지배할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났고, 예수에게 속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계획이다 ( 7:4-6). 

 

그러나 여전히 죄의 문제는 나를 괴롭히고 있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있을까?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19:16)     

 

첫번째 상황; 율법은 우리를 얽매어 버리고 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때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 7:5) -  율법이 (나쁜 )?

바울의 설명) 아니다. 율법 자체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주는 정당한 기능이 있다.  

 

두번째 상황; 생명에 이르게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 7:10) 율법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오직 정죄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스스로 멀어지게 되었다. (정체성의 상실) -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나?

바울의 설명) 아니다. 나를 사망에 이르게 것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로 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죄의 실체를 최대한으로 나타내고자 이다. (나는 스스로는 절대로 죄의 문제를 해결 없다, 죄는 실재하며 강력하며 결코 무시할 없으며 치명적이다); 아래 팔린 인간의 실존 ( 7:14)

 

세번째 상황;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는 도다 ( 7:19) 바울의 설명)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7:21)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5:17)

 

인간의 실존: 오로라 나는 곤고한 (unhappy, end of rope, wretched)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누군가가 필요하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일을 하실 있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속에 들어오셔서, 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하셨습니다. (유진 피터슨)

2022년 9월 26일 월요일

두려움 (Luke 8)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다. 그 은혜의 바다로 들어감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 되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귀한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들 내면의 선함 양심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다.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떠나갈 것을 요청했다.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그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을 본 무리들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께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모두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

     삶의 고난에 굴복하는 사람들은 시련의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쉽게 멀어진다. 호수위 풍랑속에서 위태롭게 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사로 잡혔다. 그들은 바람과 물결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또한 두려워했다.

     근심, 걱정 그리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하며 아무런 믿음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편안함이 가장 중요하기에 궁극적인 영생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오히려 비웃었지만, 예수님이 죽은 야이로의 딸을 말씀으로 살리는 것을 지켜본 후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혈루증여인은 예수를 만나고자 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소망되심을 고백한다. 혈루증으로 오랜 세월동안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님만을 만나고자 했고 세상적 두려움을 떨쳐내고 군중속으로 들어간 후 예수님께 손을 댔다. 단순한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고 평안함에 이르게 만들었다.

2022년 9월 23일 금요일

예수님을 경외함 (Luke 7)

 


     백부장은 예수님과 마주 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식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종의 병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 주었으며, 감히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부탁 하지도 못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높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백부장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했다.

 

      이와 대조적인 한 인물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식사를 나누는 도중 한 여인이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는 역사적 순간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함)을 보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 바리새인은 그 여인이 죄인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실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을 맞추지도 않았으며,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도 않았다.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비범함을 인정했고, 하나님 되심을 지적으로 동의했을 수는  있었으나, 백부장이 보여준 진실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예수님과 마주 앉아 함께 식사를 했으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진실되게 믿지 못했고, 귀한 손님에 대한 예를 갖추지 못한 바리새인에게서 우리가 가진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동의를 믿음이라고 잘못 생각하며, 그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심 (성령의 내주하심)을 너무나 당연하고 쉽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은 예수님께 깊은 경외심을 보이지 않는 위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단순한 지적인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 되심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로 인해 나의 삶이 변화함을 의미한다. 아무런 삶의 변화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단순한 입술의 고백은 세상적인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2022년 9월 21일 수요일

황금률 (Luke 6)


  

   유대인의 지혜와 묵상을 담은 책인 탈무드의 핵심가치를 묻는 이방인에게 랍비 힐렐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율법 전체의 정신입니다." 같은 의미의 구절이 신약성경 마태복음 (7:12)과 누가복음 (6:31)에는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로 표현되었다. 로마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이 말씀을 황금으로 써서 벽에 붙인 이후로 이 구절은 황금률 (Golden rule)로 불리워지고 있다.  

 

            공감; 함께 고통에 동참하며 함께 슬퍼함

 

  예수님은 나와 너의 관계속에 서로 용서함을 강조했다. 그 용서함의 기본은 헤아림이며, 이것은 쉽게 말하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공감 (sympathy, empathy)이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며 말씀을 전파하셨던 갈릴리 지역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의 병과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과부들도 많았다. 대부분 가난했으며, 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갈리리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기꺼이 공감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

 

     이러한 공감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완벽하게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방법을 제시해주셨다.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몸소 당하며 공감을 실천했다. 이 공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일이다.   

2022년 9월 19일 월요일

삶의 변화 (Luke 5)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과 당연히 주어지는 듯 보이는 삶의 조건들을 쉽게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다. 삶을 바꾸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 공허해지는 이유이다. 삶의 변화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변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어부로서 하루하루 삶을 살고 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간절히 원한 열심당 당원이었던 그들에게는 새로운 변화의 희망을 주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될 것을 간청했고,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다. 세리였던 레위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은 익숙함과 당연함의 삶을 벗어나고자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을 버리고 삶을 변화시켰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삶의 익숙함에 빠져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변화된 적극적인 순종의 삶으로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순종의 행위가 구원의 전제조건 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와의 만남으로 우리의 구원은 이미 시작 되었으며, 구원 얻은 자의 첫번째 변화는 바로 적극적인 순종임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율법에 얽매여 금식과 기도로 종교적인 열심을 과시하던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오랜 관습과 삶의 익숙함에 빠져버려 새로운 변화를 거부했고, 결국 그들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거부하며 여전히 묵은 포도주를 마시며 묵은 것이 좋다고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삶의 변화에 대한 간절함이 있는가?

2022년 9월 17일 토요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Luke 4)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광야로 가셨다.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동시에 고통과 시험도 있는 곳이다. 광야는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선택은 금식과 기도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고통과 시험을 극복하셨다

                    사람들은 편안함과 안전함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삶의 편안함과 안전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시험은 바로 그 기본적인 삶의 욕구를 통해 다가온다. 배고픔의 해결, 즐거움의 추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잘못된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의 조건들이 당연히 주어져야 하고, 항상 충족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들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러한 삶의 자세는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이다.  

                세속의 삶과 정면으로 부딪혀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도 배고픔을 느끼셨다. 하나님의 아들도 머리 둘 곳이 없음을 한탄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도 내쫓김을 당하시고 업신여김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도 폭풍우를 만났다. 하나님의 아들도 슬피 우셨으며 배신 당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삶의 모든 고통을 피하며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속의 삶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살아가야 한다.  

    죄와 욕심으로 가득찬 세상은 완전하지 않기에 그 속에서의 삶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그 불완전한 세상의 절반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도 모두 다 결국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일이다. 내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2022년 9월 15일 목요일

진짜 삶을 살아라 (Luke 3)


 

    세상의 권력자들 모두 자신만의 자리를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홀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삶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겉치례가 아닌 진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교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현대인들은 수많은 우상들에 둘러 쌓여 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극장의 우상 (프랜시스 베이컨) 에 의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편견과 자기 중심적 사고 그리고 군중심리에 의해 행동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세상의 우상들에 의해 정해지며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 기준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편안하게 세상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미  2000년전에 광야에서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임을 알려주었다. 그 곳은 깊은 골짜기이며 산과 언덕이 있고 길은 험하고 굽어 있는 곳이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과 험한 길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된다. 

 

              Act Justly, Walk Humbly, Love Mercy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묻는 무리들에게 세례 요한은 대답했다. 정직하게 살아라, 겸손하게 행동하며 자족함을 배워라, 그리고 사랑과 자비를 행하라 (미가 1:8). 세상의 헛된 것들과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을 마치 불나방처럼 쫓아다니는 삶이 아닌 진짜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바로 그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022년 9월 13일 화요일

완전한 자기부정 (Luke 2)



     하나님의 아들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완전한 존재인 하나님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 그것도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미완성된 아기라는 존재로 인간과 똑같이 태어났다. 모두가 메시아의 탄생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세상에 오실 때 오해와 반대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분의 존재자체는 고통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우리가 예상하는 '완전한 신'의 신비적인 모습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완전함을 버리고 우리에게 오셨다.


     새 언약을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셨다. 완전함을 버리셨고, 하늘의 영광을 포기 했다. 사람들의 칭송을 뒤로한 채 벌거벗은 몸을 인간에게 보여주셨다. 십자가위에서 그분은 벌거벗었으며, 스스로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는 무리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 분의 이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인해 사람들은 진리를 알게 되었다. 겉모습으로 속을 감추고 있던 무리들의 실체가 드러났다.  

            

                    결국에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실체를 드러내신다.


      우리들은 벌거벗었음을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같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스스로를 포장한다. 죄로 가득 찬 삶을 가리기 위해 위선적으로 살아간다. 남에게는 선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거룩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어 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겨 지기 원한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척 살아간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드러내신다. 나는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는가? 나는 무엇을 중요시하는가? 타인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삶이 진실된 삶이다. 


2022년 9월 12일 월요일

구원의 능력 (Luke 1)

 

     예수 관련된 많은 기록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세례 요한의 삶은 세상의 시각으로 보았을 시련과 처절한 실패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세례 요한은 가장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세례요한의 삶은 하나님님이 인정하시는 삶이었다.

                  구원의 능력이 임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처럼 보여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생을 얻은 귀한 존재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보내진 존재이다. 삶이 중요한 이유는 중심에 구원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나는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살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야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또한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직업을 통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도 한다. 삶의 중심에 구원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내가 천국에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슴 떨리는 영광 나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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