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0일 금요일

성전이신 예수님 (John 2:13-22)

     종교는 절대적 존재인 신을 향한 믿음을 가진 교인들, 교리, 그리고 제사의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요소들이 집중되는 곳이 바로 성전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이며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공간이다. 광야생활의 장막 (tabernacle) 성전을 시작으로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헤롯 성전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삶의 중심이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머무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하시지 않고, 번제를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오직 상한 심령이다 (시편 51:16-17). 성전과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오직 반복적인 종교행위에 몰두하게 되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 편의주의로 변질되어 버렸다. 제물을 준비할 필요 없이 돈만 가져오면 성전 안에서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성전은 흠없는 소, ,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 그리고 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은밀하게 허가해 주는 제사장들로 더렵혀졌다. 모두가 스스로 성전에서 충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성전을 향한 잘못된 열심이 그들을 삼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몸이 바로 성전이다.

     성전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고요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거룩한 장소가 탐욕스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성전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신 이유는 껍데기뿐인 종교행위 때문이었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제사의식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상한 심령은 없었다. 예수님은 한계에 다다른 성전을 무너뜨리고, 불완전한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직접 성전이 되어 주셨고, 성령이 우리안에 거하심을 허락하셨다. 그로인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말씀을 듣는 기쁨을 예수님은 회복해 주셨다.  

2023년 1월 17일 화요일

새 잔치의 주인이신 예수님 (John 2:1-12)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쁨과 축복의 자리인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 많은 손님들이 여전히 잔치의 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그들에게 대접할 포도주는 없었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더 이상 아무런 기쁨도 생명력도 없어진 유대교의 율법을 상징한다. 에굽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처음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기쁨과 사랑의 약속이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끄시는 광야의 기적을 경험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국가를 건설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율법은 형식만 남았고, 제사는 아무런 생명력도 보여 주지 못한 채, 특정세력들만의 특권으로 전락해 버렸다

     예수님의 첫 표적 (세메이온,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상징)인 물로 이전에 없던 좋은 새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새 창조를 가져오는 메시아적 잔치의 시작을 의미한다. 율법에 따른 정결예식을 위해 놓여 있던 물 항아리가 새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로 완전히 전환 (completely transform) 되었다. 더 이상의 깨끗함을 위한 예식은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구원의 역사가 이제 시작됨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건을 요한은 의도적으로 요한복음의 첫 소재로 사용했다. 이전까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새 언약의 주인으로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서 새 창조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했다. 계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며, 그 증거가 바로 성육신과 성령의 임재하심이다 (에밀 부르너).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메시아이신 예수님 (John 1:19-51)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했다. 호렙산 에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던 그 의문을 우리들은 여전히 갖고 있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 앞에 나타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실존적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눈 앞에 있는 하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신화속의 강력한 힘과 능력을 지닌 신들을 상상한다. 중세의 그림이나 성당의 벽화속의 신들을 진짜 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며 원하는 것을 구한다.  

     인간은 강력한 슈퍼맨같은 신을 원한다.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누구인지 알고자 그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너같은 것이 감히 우리의 허락도 없이 세례를 주느냐 라고 문책하는 말이다. 같은 질문을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도 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메시아도 필요 없다.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그들의 안정된 지위를 위협하는 걸림돌일 뿐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체는 걸림돌이 아니라 모퉁이 돌이다. 그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알아보고 고백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영생의 길을 갈구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알린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분은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예수님을 보좌한다.

2023년 1월 8일 일요일

하나님이신 예수님 (John 1:1-18)

      사도요한은 인생의 말년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쓰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였던 그는 요한 공동체를 이끌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유대교와 로마의 탄압으로 심한 고난 속에 있었다. 또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정교한 논리에 맞서야 하는 위기 속에서, 이미 작성된 공관복음서와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복음서를 만들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셨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창세기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오면서,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 천지가 창조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시며,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님은 어두운 곳을 빛으로 환하게 밝혀 주셨다. 태초에 빛이 만들어져 혼돈속의 세상을 어두움으로 부터 분리한 것 처럼, 죄의 어둠 속에 움크리고 있던 영혼들은 그 빛을 받아 진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살아왔던 세상은 가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빛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우리의 진정한 자유로운 삶이다. 예수님의 영광속에 은혜와 진리가 있다. 

2022년 12월 31일 토요일

진짜 가치있는 것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치가 있다. 흔히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물질적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한 진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돈으로 고급 포도주를 살 수 있지만, 기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맛있는 빵을 살 수 있지만, 맛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깨끗한 물을 살 수 있지만, 영원한 생수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향 좋은 에스프레소를 살 수 있지만, 삶의 여유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명품 시계를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큰 집을 살 수 있지만, 화목한 가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매력 있는 이성 (여성, 남성)을 살 수 있지만, 사랑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지만, 깊은 잠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권위있는 의사를 살 수 있지만, 생명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비싼 보험을 살 수 있지만, 안전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효능 있는 약을 살 수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안락한 의자를 살 수 있지만, 편안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흠 없는 소나 양을 살 수 있지만, 죄 사함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일등석 항공권을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살 수는 없다.
돈으로 고급 정보를 살 수 있지만, 하늘나라의 비밀을 살 수는 없다.


2022년 12월 24일 토요일

비존재 (Luke 24)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하셨고, 이전과 똑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예수님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 수 없다. 따라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예수가 아니다' 라는 삼단논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헬라철학의 핵심 논리이다. 이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의 개연성이다. 시간은 물론 공간까지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삼단논법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의 견고함 때문에 바로 옆에 계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이 나에게도 있다. 그 견고함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깨뜨리신다.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수 천년을 관통하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마음속에 뜨거움을 느끼고, 그 새로운 인식은 예수님을 다시 알아보게 만들었다.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도 그 공포스러운 죽음이 곧 임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랑했던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는 깊은 죄책감에 빠져있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은 지금도 여전히 인간들이 예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라면 다 경험하는 죽음이라는 비존재를 회피하게 된다 (폴 틸리히). 비존재 (nonbeing) 를 피하기 위해 존재 (being) 를 피하는 것은 중독, 허무주의, 영웅주의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하신 첫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항상 죽음을 기억하되 (Memento Mori), 그 죽음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간다.


2022년 12월 19일 월요일

불안감 (Luke 23)

    사람들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자신의 과오로 인한 결과에 대한 불안감, 현재의 삶에서 느끼는 갈등과 과중한 업무에 대한 불안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감까지 다양한 근심과 염려는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물질과 권력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삶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유대의 총독인 빌라도는 자신이 총괄하는 유대지역에서 소요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십자가형을 명했다. 분봉왕인 헤롯 역시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지위에 방해가 될 만한 일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판결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에 예수를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다. 빌라도와 헤롯왕은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유대지역의 책임자로서 서로 경계하면서 스스로의 권력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었다. 이 둘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그들 역시 위선적인 율법준수를 토대로 그들만의 종교적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

 

     사람들은 십자가위의 예수님께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외쳤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기적을 보이라고 외쳤다.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결 해 줄 것으로 보이는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권력이 우상이 되고,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 해 주는 신이 우상이 된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고, 불안감을 없애 줄 권력이나 절대적인 신을 원하면서 살아간다.

 

2022년 12월 13일 화요일

새언약 (Luke 22)

      세상적인  욕심이 강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적으로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추구한다. 그들은 많은 돈이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모든 관심을 재산 불리기에 집중하며, 동시에 남들 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 하고자 한다. 소유한 재산과 지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삶의 모든 자원들을 사용하며, 그것들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의 언행을 지켜본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스승을 팔아 넘기기도 하고, 자기들 중 누가 큰 자 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제자들의 어머니들은 자기의 아들에게 높은 지위를 달라고 예수님께 부탁까지 했다.  

     세상적 욕심은 소유에 집중하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율법에 얽매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모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자 한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자신들의 종교적인 노력들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위선적인 태도를 예수님은 계속 지적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 했으며 신성모독으로 고발했다. 자신들의 모든 행위는 정의롭고 올바르며 항상 타인들을 평가절하 하면서, 그들만의 집단적이고 비이성적인 사고를 고수한다. 제자들 중 실질적인 리더였던 베드로는 세상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른 제자들 앞에서 정의로운 척 하며 자신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율법적 삶은 위선적이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수많은 계약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번번히 계약은 깨지고 말았으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언으로 새 계약을 약속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그 새 계약은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최종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전 인류의 완전한 구원이다. 사람들의 세상적 욕심과 율법적 행위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의 길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2022년 12월 8일 목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11

부르심의 소망 (로마서 8 18 - 39)

 

A. 고난의 의미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 (8:18); 유대교와 로마에 의한 박해, 모든 창조세계가 함께 고난받으며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다 (해산의 고통; 새창조).

1. 인간의 실존적 모습 - 첫 열매로서 성령을 이미 소유했지만 여전히 새 창조의 완성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긴장상태

2. 소망으로 구원을 받음 -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11:1)

3. 성령의 도우심 - 시간적, 공간적인 피조물의 한계와 연약함을 성령이 도우심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심 (8:28)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8:3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들)

 

B. 하나님의 사랑

바울의 질문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8:39)."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하실 일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아들의 삶을 본떠 빚으시려고 결정해 두셨습니다. 분의 아들은 분께서 회복시키신 인류의 앞줄에 계십니다. 분을 바라볼 우리는, 우리 삶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 유진 피터슨

 

C.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

- 현실 속에서 겪고 있는 끝없는 도전들: 입시, 졸업, 군대, 취업, 결혼, 육아, 자녀교육, 직장 등     현대인의 복잡하고 바쁜 삶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지금 성령은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깨어 기도하며 인식해야 한다.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삶 또한 또 다른 고난의 삶일 수 있다. 선하고 정직하게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정의로운 선택은 쉽지 않다. 매 순간이 투쟁일 수 있다. 다수가 따르는 방법이 때로는 정의롭지 않을 수 있기에, 용기있는 소수가 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은 나의 선한 행동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 의롭다라는 말은 내 속에 죄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몸에 여전히 병원균이 있지만 나의 면역력이 강하게 작용하여 건강을 유지 하는 것과 같다. 내 속의 죄성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용기가 필요하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좁은 길로 인도한다.

2022년 12월 2일 금요일

마지막 때 (Luke 21)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선언하면서 시작되고 ( 1:1),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1)로 끝맺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다 ( 1:14). 이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주관하신다. 모든 것에 시작과 마지막이 있듯이 세상에서의 삶에도 처음과 끝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제한된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는 그 마지막이 다가오지 않으리라고 착각한다. 그는 또한 막상 그 마지막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모순된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 제한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신이 되려 하며 헛된 우상들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들을 끊임없이 깨뜨리셨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상화 될 때 지성소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성전은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율법이 우상화 될 때 그 율법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우상화된 교황의 권위는 종교개혁을 통해 그 허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우상화되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세계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능력과 경제적 가치가 우상화된 현 세상에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경제적 고통은 바로 하나님의 경고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상들을 깨뜨리신다.

 

     2000년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의 때를 암시적으로 예언하셨다. 언젠가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 이 세상의 종말이 올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은 우리에게 종말론적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이 세상에서의 제한된 삶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에는 마지막이 있으며, 그 이후 얻게 되는 영생을 통해 새 창조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음을 인식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동행하신다.

 

세상의 처음과 끝을 예수님이 통치하시듯, 나의 삶의 처음과 끝에 예수님이 동행하심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귀중한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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