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8일 월요일

진짜 가치 (Matthew 20)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과 오후에 단 1시간을 일한 일꾼들 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다. 만약 그 포도원이 자본주의 사회의 직장이라면 매우 불평등한 지급이었고, 먼저 온 자들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의 가치를 수치화한다. 살고 있는 도시, 직업, 집의 넓이, 타고 다니는 차가 나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 사람들은 연봉, 성적, 생산성, 효율성 같은 숫자에 얽매여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문 20 1절에 포도원은 하나님의 나라 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수치화 할 수 없는 또 다른 가치를 알려주고자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안에 참여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임마누엘)을 즐기는 삶이다. 진정한 인간됨의 가치는 내가 하나님께 붙어 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엄청난 영광을 누렸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에 들어온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가장 큰 축복의 가치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가치를 알아 보지 못했고, 주인을 악하다고 원망했다.  

 

                   "진정한 인간됨의 가치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나타난다."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한 야고보와 요한는 먼저 된 자였다. 그러나 이들의 어머니는 세상 관점으로 하늘 나라를 이해했고, 아들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예수께 구했다.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지만 제자들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여전히 세상의 가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함의 가치를 알지 못하게 되면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고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You have no idea what you're asking.

2022년 2월 25일 금요일

로마서 성경공부 01

1. 크리스천의 정체성 (로마서 1 1-17)

 

A. 예수님과 나의 관계성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로마서를 시작한다.

- 예수그리스도의 종, 사도, 복음을 위하여 선택됨 (1:1)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인간의 질문: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나? (인간의 의심과 지혜없음, 영지주의자)

인간이 신의 존재를 경험적, 우주론적, 목적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

올바른 질문: 왜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나? (인간의 실존적 질문)

예수그리스도;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부활하심 (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미리 약속됨) - (100%),인간(100%)

 

당시 로마의 상황 (2000년전) - 네로 황제의 통치, 로마의 기독교인은 100명이 되지 않았고 (톰 라이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과 예수를 따르는 유대인 사이의 갈등.

1) 유대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다.

2) 영지주의자;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 오직 영적인 것만 옳다고 주장

3) 사두개인들; 부활을 믿지 않음. 모세 오경만을 믿음

4) 헬라인들; 영과 육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 스토아 철학).

5) 로마인들; 황제는 신의 아들 (son of God), 황제의 생일은 좋은 소식, 복음 (gospel)

 

너희도 예수그리스도의 것 (belong to Jesus Christ) 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1:6)

 

B. 부르심을 입은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헬라인 - 야만인, 지혜있는 자 - 어리석은 자, 유대인 이방인, 로마인 식민지백성들

율법을 지키는 자 (바리새인, 서기관) – 율법을 어기는 자 (일반 민중들)

가진 자 못가진 자, 지배계층 피지배계층

 

복음의 대상은 특별계층에 제한되지 않는다. 바울이 던진 심각한 도전

 

우리의 욕심과 죄성은 스스로를 상대우위에 두는 계층에 속하게 한다. 그 안에 속함으로 안정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예)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을 묻는 부자청년, 바리새인

 

For the gospel reveals how GOD puts people right with himself: it is through faith from beginning to end. (Romans 1:17)

 

C. 복음-하나님의 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복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1:16)

구원;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를 타락과 부패에서 구출하심. 미래의 소망이며 현재진행형

   ; 하나님의 언약적 정의 (God's covenant justice) - 예수 그리스

믿음; 우리가 목격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을 붙드는 것.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진실로 세상의 구원자되심에 대한 확고한 신념.

 

   기독교 세계관: 창조 - 타락 - 구원 (구속) - 회복 (재창조)

2022년 2월 23일 수요일

은혜와 신비 (Matthew 19)

 


하나님은 결혼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며 신비한 창조원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이혼과 간음을 정당화시켰고, 그 율법을 이유로 예수를 몰아 붙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단지 율법에 기록된 선행을 행함으로 가능하다고 잘못 여기고 있는 것도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상에서의 삶은 말씀의 묵상과 거룩의 연습을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지식을 모아서 율법과 규정을 만들고, 그 바운더리 내에서 굴레를 만들어 살아간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속에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율법과 규정들이 오히려 나의 삶을 숨막히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왜곡시켜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종교적인 의식과 성전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가둬놓은 채 살아가고 싶어한다.  

 

                          "삶은 말씀의 묵상과 거룩의 연습이다."

 

내 삶은 내 마음대로 나 스스로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으로 살아가면서, 내 원함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에 규정된 선한 행동들은 최소한으로 지키면 된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댓가로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영원한 생명은 나의 종교적 열심과 노력 그리고 선행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전혀 자랑할 것이 없다. 구원은 온전하지 못한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If you want to enter the life of God, just do what he tells you.

2022년 2월 22일 화요일

하나님의 나라 (Matthew 18)

 


내가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살고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세계, 혹은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이 하늘나라이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의 몸이 거하는 이곳이 바로 하늘나라일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가정을 가꾸고, 직장에 다니며, 교회에 출석하고, 성도간의 교재를 갖는다. 나는 무리를 이탈한 한 마리 양 이며, 왕으로부터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종 이기도 하다. 온전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나의 노력으로 그 은혜의 빚을 다 갚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기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 볼 여유가 없다.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관대하게 대할 수 없다. 내 지식과 열심으로 무엇인가 이루어서 내 의를 쌓을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은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바로 죄의 본질이다.  

 

                               "나의 열심으로는 내 의를 쌓을 수 없다."

 

내 삶에서 집중해야 하는 진짜 본질적인 것들은 나의 불완전함을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들고 죄 있는 자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약함을 긍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용기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약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나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기에, 용서와 사랑과 관대함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A yes on earth is yes in heaven: a no on earth is no in heaven. What you say to another is eternal.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천국의 영광 (Matthew 17)

 


사람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표적을 계속 구했다. 사탄도 예수를 시험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낼 것을 요구했다. 예수님은 그 증거를 우리에게 나타내실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진실은 언젠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예수를 따라 다니며 표적을 보고자 했던 그 무리들과 이천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눈 앞에 좀 더 확실한 증거, 나에게 이익을 주는 물질적 증거를 끊임없이 바라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보여주셨지만, 우리들의 시야는 여전히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다.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어느 날 세 명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계시의 상징인 엘리야 선지자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놀라운 광경을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는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이 영광스러움을 경험한 세 제자들의 이후의 삶은 변화되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예수님의 복음을 최전선에서 전파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작성하며 험난했던 기독교 탄압의 시기를 견뎌냈다. 야고보는 영광스러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행복한 영생의 삶을 살았다.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말씀속에 그 하늘나라의 영광된 모습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  

 

They realized that Moses and Elijah were also there in deep conversation with Jesus.

2022년 2월 18일 금요일

예수님은 누구신가 (Matthew 16)

 


하나님은 80억의 인구 가운데 티끌같은 나를 알고 계시며,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참된 나의 모습을 찾아내기를 원하신다. 온전한 나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는 내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2000년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셨고, 같은 질문을 오늘 나에게도  하신다

 

나는 세상의 비본질적인 것들 - 부와 명예, 욕심, 위선 등 - 을 우선적으로 추구하기에, 나를 이루는 진짜 본질적인 것을 잊고 살아간다. 나의 욕심을 위한 노력은 아무 희망이 없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는 경쟁으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으며, 자신들만의 허상을 이루고자 한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희생하시면서 인류전체를 구원하셨다. 나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나의 존재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나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나의 존재를 바로 볼 수 있다."

 

내 존재의 연약하고 죄 많은 불완전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는 예수님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하는 해준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이 모든 길을 인도해주신다. "예수님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인간의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절대자에 대한 경외의 물음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속에서 인간의 로고스 (철학)는 하나님의 로고스 (예수)와 계속해서 충돌 해 왔지만, 예수님만이 참 진리이심이 증명되었다.

 

                                "예수님만이 참 진리되신다."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께, 산헤드린 법정에 서신 예수님께, 총독 빌라도의 뜰에 서신 예수님께, 무수한 사람들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라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진리의 말씀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을 떠날 수 없다.  

 

 What do you say I am?

2022년 2월 16일 수요일

껍데기 신앙 (Matthew 15)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은 그들의 안식일 규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비난했다. 그 규정들은 하나님이 정해준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행동지침들이었다. 그들은 2000년전 광야에서 주어진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기본 정신을 잊어버렸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껍데기 같은 헛된 규정들만이 남아 스스로의 삶을 얽매고 있었다. 그들은 그 규정들을 지키며 자신들만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의 의로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았다. 예배와 의식을 핑계로 이웃사랑을 하지 않았고, 성결을 핑계로 마음속에 있는 사악함을 드러냈다. 그들의 말은 위선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을 유대민족이라는 좁은 틀 속에 가두어버리는 큰 오류를 범했다.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로 겉모습을 포장한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삶의 모습을 버리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좀 더 화려하고 멋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종교적 행위로 겉모습을 포장하려고 한다. 수많은 율법의 규정들은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며, 율법 자체도 완전하지 않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로움이시며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과 진리가 되신다.

 

You cancel God's command by your rules. These people make a big show of saying the tight thing, but their heart isn't in it.

2022년 2월 15일 화요일

예수님의 권위 (Matthew 14)

 


광야에서 모세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 매일 충분한 양이 공급되었지만, 저장은 할 수 없었다. 즉, 일용한 양식만이 주어졌다. 여러 세대가 지난 후 또 다른 광야에서 예수님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기도하시고 축복하신 후 말씀을 듣기위해 모인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제자들은 열두 광주리의 남은 것들을 넉넉하게 모을 수 있었다. 율법으로 상징되는 모세를 통해서는 일용한 양식만이 공급되었으나, 예수님의 기도로 주어진 풍성하고 영원한 양식은 우리에게 허락될 영생을 상징했다.

 

 율법은 결코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피의 제사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지성소의 휘장은 찢어졌다 ( 23:45). 이 모든 사건들은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준다. 유대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받드는 아브라함보다도, 유대교의 창시자요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보다도 훨씬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눈 앞에 육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따지듯히 물었다 ( 20:2).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3:14). 예수님도 진리의 말씀 자체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신다.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경외심과 떨림을 갖고 그 은혜를 헤아리는 것이다.  

 

                            "경외심과 떨림을 갖고 그 은혜를 헤아리는 것"

 

나를 철저히 죽이고 죄인임을 인식할 때에만 그 영생의 풍성한 은혜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육신의 배고픔만을 채워주는 자신들이 원하는 신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안부를 물으며 거짓으로 사랑하는 척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가룟 유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 26:49).  

 

They all ate their fill. They gathered twelve baskets of leftovers. About five thousand were fed.

2022년 2월 13일 일요일

보는 눈과 듣는 귀 (Matthew 13)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다 (잠언 1:7).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어도, 받아들임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뜨겁게 받아들였지만 오래가지 못해 감정이 식어버리거나,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도 있다. 세상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지나쳐서, 말씀이 삶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수 도 있다. 

 

우리는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만을 우선적으로 취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보암짐하고 먹음직한 선악의 열매를 먹었고, 아브라함은 곡식이 풍족할 것 같은 에굽으로 피신했으며, 롯은 물과 풀이 풍성한 것 같은 소돔과 고모라 땅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들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하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다. 풍성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넘치도록 주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기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자라나며 풍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인 보물이다"

 

거짓된 허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감추인 보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말씀이 임하는 그 곳,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는 축복을 누린다.

 

You have God-blessed eyes-eyes that see and God-blessed ears-ears that hear.

2022년 2월 11일 금요일

사악함 (Matthew 12)

 


예수님의 행하심과 말씀들은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을 보고 예수를 파멸시킬 방도를 찾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을 마술정도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악함이 있었다. 다윗의 자손으로 칭송받은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한 그들의 우월적 지위가 유지되기 원했다.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증거와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며 정의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며, 그 비방은 결국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가 바로 그들의 눈 앞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 고침을 행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 53). 마음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악함은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주고 잘못된 욕망을 채워 줄 것들을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을 만들었다. 나의 존재의 의미는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다 (살전 2:4). 죄와 욕심으로 인해 온전하지 못한 나의 실존적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사악함을 제거하기 위해, 시험에 들게 하지 않게 그리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을 매일 기도해야 한다 ( 6:13).

 

It is not the dictionary but your heart that gives meaning to your words. A good person produces good deeds and words season after season.

2022년 2월 9일 수요일

광야의 말씀 (Matthew 11)


 

2000년전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던 세례요한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바리새인들도 있었고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의 권위를 가졌다고 알려졌기에 그 세례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광야는 헛된 욕망을 채우러 가는 곳이 아니라,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말씀이 있었고, 죄를 회개해야 했고,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음이 선포되었다. 

 

요한은 엘리야에 비유될 만큼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그의 역할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다 (요 1:8). 그러나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싶어했을 뿐, 예수님의 오심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지 않았다 ( 1:10, 11).  

 

                 "선포하는 자와 듣는 자의 역동성이 바로 생명"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람들과 소통하셨고, 말씀으로 스스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셨다.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려주셨다. 예수님은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광야로 초대하신다. 우리는 그 광야의 말씀을 듣고 반응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와 듣는 자의 역동성이 바로 생명이다.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다 ( 6:68). 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우리의 삶은 회복될 것이며, 멍에를 벗어나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What did you expect when you went out to the wild?


2022년 2월 8일 화요일

작은 소명 (Matthew 10)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설교나 간증은 인생의 성공담이다. 대부분의 주인공은 어려운 시절을 지나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우연히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나 성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야기, 어려움 중에도 교회에 헌금한 이야기, 새벽기도에 나갔던 이야기 등이 양념처럼 포함된다. 말씀에 의지하여 성실하고 희생하며 살아갔지만, 세상의 성공을 얻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명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그들은 부와 명예를 얻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비참하게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제자들의 이름을 따라 자녀들의 이름으로 지어 주지만, 그들의 삶을 따르기 원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세우신 열두명의 제자들은 귀신을 쫒아내고 상한 심령들을 돌보는 능력을 받았다. 세상이 그들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도 혹은 거부할 수 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기분좋은 말을 해 주거나 물질적 이득을 얻게 해 주는 신을 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선포이다. 세상에서의 편안한 삶과 물질의 축복은 복음의 내용이 전혀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품인 낮아짐, 순종, 관대함, 긍휼, 온유함 등을 인생의 패배적인 것들로 여긴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았던 이유도 그 분의 사역이 사람들의 기대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미워할 때 포기해서는 안된다. 나의 몸은 사람들에 의해 휘둘릴 수 있지만 나의 영혼은 온전히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이 복음의 진리로 인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움받았다. 세상에서의 소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그 소명을 계속해서 행해야 한다. 남에게 작은 것을 베푸는 삶으로도 우리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 

 

Don't quit. Don't cave in. It is well worth it in the end. It is not success you are after in such times but survival. Be survivors!

2022년 2월 7일 월요일

연민 (Matthew 9)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심과 복음의 선포 그리고 질병의 치유였다. 병은 육체를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누구나 극복해야한다. 2000년전 예수님 당시에는 의료기술의 미비, 가난, 불평등으로 인해 질병은 평생 고통과 함께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기에, 현재 우리가 느끼는 병의 의미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병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병의 원인을 자기 자신 또는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들의 심령은 말할 수 없이 상해 있었다.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던 수많은 민중들은 유대지역중 가장 처절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갈리리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전파와 치유의 역사를 행하셨다. 세상에 지쳐있는 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느끼는 수많은 병자들에게 예수님은 연민 (compassion)을 갖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우리의 아픔을 연민을 갖고 사랑하시는 예수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아픔을 연민을 갖고 사랑하신다. 육체의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성장이 진행되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시며, 병의 나음 이후 이들의 믿음이 계속 자라나기를 예수님은 원하신다.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마다 그들의 믿음을 언급하신 이유이다. 단순한 병의 나음보다 그 이후의 삶 - 담대한 믿음, 믿음의 모험, 소망 등 - 이 예수님에게는 더 중요했다. 우리의 육체는 결국에는 없어지고 오직 영혼만이 영생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When he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for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confused and aim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2022년 2월 5일 토요일

내면의 치유 (Matthew 8)

 


누구나 원치 않는 병에 걸리면 우선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피조물 중 유일하게 종교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병의 원인은 유전적 원인,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 방식, 아니면 사고에 의한 것이지만,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와 병을 연관시키는 태도를 갖는다.  

 

예수님 당시 육체의 질병은 부모나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는 강한 인식 때문에, 그들은 사회로부터 기피의 대상이었다. 사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병의 치유였다. 병자들은 육체적 고통과 함께 내면의 아픔 - 절망, 소외, 수치심- 을 같이 갖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병자들의 소망없음을 안타까와 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께서 그 병의 치유를 통해 단순한 육체의 회복 뿐 아니라 내면의 치유를 주시고자 하셨다. 예수님에게는 육체의 병 보다는 그들의 믿음의 삶이 더 중요했기에, 아픔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러므로 치유를 통해 단순히 몸이 회복된 것에만 만족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만나지 못한다.  하나님은  괴로움, 아픔, 슬픔, 고통의 모든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감사의 태도, 삶에 대한 사랑과 의지는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다.

 

Your cleansed and grateful life, not your words, will bear witness to what I have done.


2022년 2월 3일 목요일

생명에 이르는 길 (Matthew 7)

 


믿기만 하면, 한 번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거짓 설교자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1:17),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10:10) - 를 왜곡하여 전달한다. 로마의 탄압하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 당시 믿음의 고백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용기있는 행위였다. 그러나, 거짓 설교자들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설명없이, 듣기 좋은 소리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위로하는 듯 하지만 모두 거짓이다 (마 7:15). 

 

영생에 이르는 길은 세상과의 끝없는 갈등이다. 세속적 세상에 살고 있기에 육체의 욕심에 따라 매순간 흔들린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룩한 척 종교적 위선을 갖고 살아간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 위선적 신앙을 지적하셨다. 나의 연약함을 고백할때, 예수님은 나의 강함이 되어 주신다 (고후 12:10). 예수님이 그리스도되심을 믿고 신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내 삶은 단순해지며 주어진 삶은 말씀 실천의 시공간이 된다. 타인에게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먼저 해 주어야 하며, 나의 이로움을 위해 타인을 이용해서도 안된다. 

                              "나는 결코 어떠한 자랑도 할 수 없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한 번의 믿음고백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삶에서 실천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주어진다. 그러나 내가 행한 삶의 실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나는 결코 어떠한 자랑도 할 수 없다 (갈 6:14).

 

The way to life-to-God is vigorous and requires total attention


2022년 2월 2일 수요일

단순한 기도 (Matthew 6)

 

 나는 멋지고 선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의 선한 행동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기를 원한다. 나의 약함은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과 말은 상당히 계산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거쳐 나온다. 나는 세상을 마치 연극 배우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 그 분 안에서 자유롭고 평안한 삶을 살도록 계획하셨다. 의미없는 연극은 나를 복잡하고 거짓되게 만든다. 남에게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나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솔직해져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매우 단순하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소망하는 기도이다. 그 단순한 기도를 드리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것이 진짜 나의 삶이다. 내 삶의 중심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겨지게 된다. 

 

                       "예수님을 기념하며 --- 즐거워하는 거룩의 연습"

 

예수님은 바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정확하게 자신의 소명대로 살았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려주셨고,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셨다. 묵상은 바로 그 예수님의 삶을 기념하며, 그 은혜가 나에게도 임함을 즐거워하는 거룩의 연습이다.

 

Just be there as simple and honestly as you can manage. The focus will shift from you to God, and you will begin to sense his grace.

2022년 2월 1일 화요일

기쁘고 떳떳한 삶 (Matthew 5-3)

 


유대사회에서 권세있는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서류와 법적 권리를 주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정해준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남자들은 이 규정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기심과 변덕스러움을 옳은 일인것 처럼 포장했다. 예수님 당시 이혼한 여자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매우 차가왔고, 여자들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예수님은 그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남자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합법을 가장한 수많은 도덕적 타락이 교회안에서조차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모두가 멋진 말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포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인간의 이기적 욕심이다. 욕심이 생기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 (야고보서 1:15).  

 

                    "하나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욕심을 버린다. 애통하는 자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슬퍼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불의와 악을 미워한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연약한 자를 보살핀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그로 인하여 평생동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즐겁고 기쁘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시편 90:14).

 

Too many of you are pretending to be righteous just because you are legal.

You can't use legal cover to mask a moral fail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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