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31일 월요일

하나님과의 연합 (Matthew 5-2)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일용한 양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함께 함,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등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무심코 흘려버린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아쉬운 세상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 나에게는 당연한 한 끼의 식사가 누군가에게는 온 가족의 절실한 하루 양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쏟아버린 물 한 양동이를 얻기 위해 누군가는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한다. 나는 언제든지 인생의 벼랑끝으로 몰릴 수 있고, 원하지 않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삶의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이 당연함에서 오는 편안함을 경계해야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삶의 편안함이 점점 확장되어지고 다양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오해한다. 자신은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열심과 선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많은 신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착각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유일한 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함께 하심의 길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성령님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오셔서 실제적으로 나와 하나님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짐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복받은 자들의 소명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특별히 삶의 성공을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삶에서 손해보고, 손가락질 당할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내가 가장 큰 복을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그 귀한 본보기가 되어주셨다.

 

You discover who you really are, and your place in God's family.


2022년 1월 30일 일요일

역설적 구원 (Matthew 5-1)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갈릴리지역에서 선포되었는데, 그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이었다. 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죄인이라 손가락질 당하던 인생의 실패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진다고 선포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인생의 벼랑끝에 서있는 사람이며, 애통하는 자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온유한 자는 모든 고난을 겪고 아무런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의 모습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아무 의지할 곳이 없이 예수님만 따라다니는 사람들며,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자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아무런 욕심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민중들이며, 화평케하는 자는 다른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는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다. 산상수훈은 그 당시의 지배계층에 의해 차별받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갈릴리의 비참한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함을 선포한 귀한 말씀이다.

 

이사야 61장에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에게 메시야의 구원이 임한다고 예언되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누가복음 4:16에 명시되어 있다. 율법을 지켜야만, 종교적인 열심을 내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그 당시의 행위구원론에 대항하여, 예수님은 엄청난 도전을 던지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 노력과 행동에 대한 댓가로, 아니면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전제로 신에게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구원론에 깊숙히 젖어있다.  

 

               "아무 자격없는 나를 조건없이 구원하시는 신적의지"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아무 자격없는 나를 조건없이 구원하신다는 신적의지를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존재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근본적인 죄책감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셨다. 나에게 병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치료가 시작되는 것처럼, 나에게 죄가 있음을 인정해야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기에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고 있던 갈릴리의 무리들이 오히려 복되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구원론은 바로 우리에게 복된 소식이 된다

 

우리는 언제나 부족하며, 죄에 빠져 있고, 세상의 유혹을 이길 힘이 없지만, 이러한 것들이 절대로 우리를 절망케 할 수 없다. 우리가 이룩해 놓은 것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된다.


2022년 1월 29일 토요일

광야의 시험 (Matthew 4)

 

인류를 향한 참사랑의 구원 역사를 완성하실 예수님의 첫번째 사역은 광야에서 금식하며 시험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첫 사역으로는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빛은 밝은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천지가 창조될 당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 1:2),  '빛이 있으라' 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죄와 암흑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그 빛의 목적을 흐리기 위한 어둠의 세력들은 세 번의 시도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려고 했다. 그 어둠의 상징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라고 유혹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십자가의 고통을 지지말고 세상의 절반을 가져라'라고 제안했다. 3년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실 때, 어둠의 세력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유혹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스스로를 구원하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20)"

 

그 어둠의 세력은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여전히 유혹한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너의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지위까지 올라가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많은 돈을 벌고 삶을 즐겨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 내가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2000년전 광야에서의 시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오직 '말씀' 으로만 이 모든 시험들을 이길 수 있다. 귀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이다.

 

Jesus was taken into the wild by the Spirit. The Devil was ready to give it.

2022년 1월 28일 금요일

참과 거짓 (Matthew 3)

 


인간을 향한 참 구원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머물렀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혼돈의 시대에 예수님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셨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시면서 창조 질서를 만드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이라는 표현은 '구분하다' 라는 의미이다. 에덴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구분되는 상징이었다. 그 경계를 넘어서려는 순간 피조물은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확인한 후,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들을 가리기 위해 피조물인 인간들은 거짓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삶의 거짓된 것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태워버리셨다. 

 

                     "내 삶의 참된 것들만이 하나님 앞에 놓여진다"

 

창세이후 지속되어 온 하나님의 공의는 바로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 열정적 사역을 예수님이 완성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이제 내 영혼과 육체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함을 선함으로부터 구분해 내는 거룩의 연습을 도와주신다. 내 삶의 참된 것들만이 하나님 앞에 놓여진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그리고 헛된 욕심을 위해 쌓아올린 나의 거짓된 모습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사라져 버린다 (시편 1:4).

He will place everything true in its proper place before God.

2022년 1월 27일 목요일

말씀의 성취 (Matthew 2)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나타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고,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다. 창세이후 인간의 이기심과 죄성이 드러났을 때 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위대한 역사였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 속에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부활, 구원 등이 이미 상징적으로 서술되어 있었고, 그 말씀들은 결국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아기 예수를 보호했으며 애굽으로 피신케 했다. 어린 예수는 나사렛에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몸과 마음이 자라며 장성해 갔다(2:52).

 

하나님의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이 놀라운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 달랐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구주가 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확인한 후 벅찬 가슴으로 돌아갔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예를 갖추기위해 먼 길을 여행하여 예물을 드리고 기뻐했다. 헤롯왕은 예수의 탄생으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베드레헴의 모든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죽였다. 제사장들과 종교학자들은 예수님의 태어난 장소까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시작되자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자들만이  누리는 충만한 은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통해, 교회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자들만이 충만한 은혜를 누린다.

 

From you will come the leader who will shepherd-rule my people


2022년 1월 26일 수요일

임마누엘 (Matthew 1)

 


예수님의 족보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그 행적이 서술되어 있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 족장들의 이름, 왕들의 이름,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름들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인물들의 이름도 있다. 왕정시대, 포로시대, 예루살렘 귀환시대와 로마 식민시대에 이르기까지 족보에 그 이름조차 오르지 못했던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무명의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후손으로 인해 온 인류의 죄가 용서받고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갈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이름도 없이 잊혀진 그들의 삶을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무명의 사람들의 삶은 과연 의미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비록 그들의 삶에 대해 성경은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삶은 평범하고 또는 비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들은 그 시대 그 장소에 살아었다는 것 자체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병들고 죽었지만, 그 오랜 기간의 역사속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족보속의 사람들을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지켜내셨고, 마침내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나의 삶 곳곳에 관여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내 삶의 모든 시간들이 엄청난 은혜의 순간이 되는 이유이다.

 

They will name him Immanuel (Hebrew for "God is with us").


2022년 1월 25일 화요일

나에게 하는 질문 (Mark 16)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르렀다.

그 이름의 권세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받은 우리의 삶은 변화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그들은 세상 속으로 흩어졌고, 땅끝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끝없는 질문 속으로 나를 밀어 넣으며 나를 의심해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나는 받은 소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나는 구원받은 자로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매일매일 새로와지고 있는가?

 

Now, on your way


2022년 1월 24일 월요일

하나님의 아들 (Mark 15)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죄악에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한 위대한 은혜의 역사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에게  '너 스스로를 구원해보라' 라고 소리쳤다.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십자가를 져야 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다고 소리쳤다. 정말로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스스로를 위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선한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스스로의 소명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침묵하며 그 길을 걸었다.

 

                         " 하나님의 로고스가 이 땅에 그 뜻을 이루는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이 땅에 그 뜻을 이루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어떠한 상황도 예수님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갈 길을 묵묵히 걷는 자이다. 세상 사람들은 기적을 보여달라고 소리쳤지만, 예수님의 묵묵함 앞에 결국 침묵했다. 세상은 마침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했다.

 

Save yourself! If you're really God's son, come down from the cross!


2022년 1월 23일 일요일

지혜로운 사람 (Mark 14)

 


지혜로운 사람은 적절한 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겸손하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 사람의 행동이 때로는 세상의 물질적 논리에 맞지 않을 수 도 있다. 예수님의 머리에 300데나리온 어치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이름없는 여인의 행동은 분명 논리적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 당시 1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소중히 여겼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이 여인의 행동은 칭송받고 있다.

 

미련한 사람은 기회를 옅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의 결과에 집착한다. 가룟 유다는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이 예수님에게서 보이지 않았기에, 두둑한 보상을 받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무리에게 팔아 넘기기로 했다. 하나님의 새 언약 (31:31)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는 그 위대한 자리에 함께 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사악한 사람은 진리를 왜곡한다. 거짓과 위선으로 스스로를 거룩하게 포장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며 거짓 증언을 서슴치 않는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율법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더이상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계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함하여  신성모독 (blasphemy)의 죄로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다.

 

                                  "선한 능력에 의지하여 순종하며 사는 자"

 

하나님의 가치관을 품고 그 분의 선한 능력에 의지하여 순종하며 사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 삶은 때로는 비논리적이고 세상의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믿음의 삶은 확신과 용기를 요구하기에 결코 쉽지 않다. 예수님도 그 삶을 두려움과 깊은 근심으로 맞이하셨다 (14:32-34). 오직 기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

 

She did what she could when she could - she pre-anointed my body before burial.


2022년 1월 22일 토요일

삶의 자리를 지켜라 (Mark 13)

 


환란, 재난, 그리고 혼돈의 때는 갑자기 우리에게 닥친다. 예수님은 웅장한 헤롯성전도 결국에는 로마에 의해 파괴될 것임을 예언하셨다. 또한 다가올 환란의 시기에 거짓 메시지가 곳곳에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임을 말씀하셨다. 환란은 인식할 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에 의한 팬더믹으로 인해 3년째 세계 모든 곳에서 두려움과 공포, 사망자의 속출 그리고 일상적 삶의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투쟁"

 

역사에 늘 반복되는 종말의 징조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재해들의 모습으로, 또는 인간의 무지와 탐욕으로 인한 정치적 종교적 갈등, 민족간의 전쟁, 환경오염,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대인의 삶은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투쟁이다. 하나의 재난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되며, 우리들은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재난들 속에서 살아간다.

 

이 상황들은 나에게는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혼란의 와중으로 휩쓸려 빠져들며 어쩔 수 없이 세상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예수님은 이러한 재난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끝까지 우리 삶의 자리를 지키고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감사하지 못했다. 언제나 혼란의 연속인 그 일상의 삶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견딘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병으로 그 삶의 자리에 서 있는다. 그 파수병이 아침을 기다리듯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살아간다.

 

 Stay with it to the end. You're placed there as sentinels to truth. 

 


2022년 1월 21일 금요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의 평범한 어부였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호수의 주요 지점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곳에서 평소에는 충분한 양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기에, 베드로는 호수 한 가운데의  깊은 곳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갈릴리 호수는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가 심했고, 풍랑과 파도가 심한 호수 한 가운데는 그에게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평소에 잘 가지 않던 곳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는 허탈한 심정으로 육지로 돌아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고, 마침 그의 배에 앉으신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베드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있었던 베드로는 말씀의 비범함에 분명히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예수님이 혹시 옛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야가 맞을수 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베드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형제 안드레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예수님을 만난 적도 있었다 (1:40-42).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5:8)"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master)이라고 부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익숙하지 않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그물을 던져보지도 않았던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다. 베드로는 그 새로운 도전을 통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물고기떼를 건져 올렸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주(Lord)로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선생님(master)에서 주(Lord)로 바뀌면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참된 진리를 소망---"

 

우리들은 일상의 삶속에서 익숙함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삶의 패턴을 변화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 없기에 거듭난 삶을 살기 어렵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너무나 보잘것 없기에 절대로 의지할 만 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우리는 그 얕은 경험과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한다. 우리에게 묵상이 필요한 이유는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참된 진리 -나의 바운더리를 뛰어넘는-를 소망하고, 도전하고, 따르기 위함이다.

 

                           "믿음은 절대적 존재로 향하는 용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11:1)이고, 절대적 존재로 향하는 용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경험과 사고를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은 인간의 윤리나 보편적 이성을 초월한다.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다.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한다. 익숙하지 않는 곳,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곳, 바로 그 은혜의 바다속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야 한다. 삶의 새로운 도전은 거듭남을 위한 첫걸음이다.  


2022년 1월 20일 목요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Mark 12)

 

 

종교학자,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하셨고, 성경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답변을 하셨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욕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멋대로 말씀을 해석하려고 했다.

포도원을 맡은 소작농들은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다.

사람들은 세금의 의무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결혼을 잘못 이해했다.

말씀에 대한 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했다.

그 왜곡으로 종교학자들은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착취했다.

 

                           "말씀에 대한 무지와 왜곡된 하나님의 은혜"

 

미련한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잘 모른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식을 아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평생토록 하나님을 공부해야 한다.

 

You don't know the Bibles, you don't know how God works.


2022년 1월 19일 수요일

하나님의 생명 (Mark 11)

 


기도는 하나님의 생명을 품는 행위이다.

기도는 우리의 호흡이며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다.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것 처럼 영혼의 에너지는 기도를 통해 공급된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했으며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담대하다.

성전의 더렵혀짐을 참지 못하고 모든 악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용기는 기도에 의한 충만한 생명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생명을 품어라"

 

하나님의 생명을 품은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며, 그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깨끗히 용서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 (1:12).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11:25-26), 그 생명은 영생의 복을 우리에게 준다.

 

Embrace this God-life. Really embrace it, and nothing will be too much for you.


2022년 1월 18일 화요일

영혼의 눈 (Mark 10-2)

 


예수님은 나면서 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또한 그가 눈을 뜬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정상인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기적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현대의학은 수술을 통해 소경도 정상적인 시력을 갖게 해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발전된 의술이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의 변화를 순식간에 적응하게 할 수는 없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각이 감각기관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각경험과 인식교육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단순히 바디매오의 육체적인 눈만을 뜨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시각을 통한 인식, 영혼의 눈까지 되찾게 해 주셨다. 정상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무감각할 수 있다. 보는 눈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는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한다. 손으로 만져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디트리히 본 회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영혼의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알아가야 한다. 단순한 현상세계의 사물들만을 인식하는 감각이 아닌, 하나님을 인식하는 감각의 훈련이 필요하다.

 

Your faith has saved and healed you. In that instant he recovered his sight and followed Jesus down the road.


2022년 1월 17일 월요일

수단과 논리 (Mark 10-1)

 


사람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만들어내고 그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를 만들어낸다.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조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기에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 그는 율법준수라는 수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율법이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해준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는 그 논리의 불합리화로 인하여 고민하며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아갔다.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는 정작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 두 가지 계명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목적과 소명이다. 우리는 그 목적과 소명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단과 논리도 만들 필요가 없다. 오직 겸손과 순종 그리고 낮아짐만이 필요하다. 용납받을 수 없는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삶에는 어떤 논리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이성적 판단은 성령이 인도하는 마음 속의 양심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한다

 

선한 양심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며, 그것이 최고의 지혜를 얻는 유일한 길이다.

 

Go sell whatever you own and give it to the poor. All your wealth will then be heavenly wealth. And come follow me.


2022년 1월 16일 일요일

어린아이 (Mark 9)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제자들은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함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었다. 이 일이 있는 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말싸움이 벌어졌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자들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한다.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함께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타인들의 부족함을 이용해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자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유치한 경쟁을 교회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용한다. 무리지어 당을 만들고 그룹을 지어 편을 가르기도 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는 것이 하나님을 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의 물질적 가치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항상 즐거우며,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임에도 금새 친구가 되며, 함께 나누며 논다. 아이들은 결코 유치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어린아이의 삶을 초인 (super-man)에 이르는 마지막 단계로 설명한다. 그는 어린아이의 특징을 새로운 시작, 놀이로서의 삶, 창조성, 미래를 향한 거룩한 긍정, 자연의 질서 긍정 등으로 표현했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세상의 문화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은 어린아이들의 삶에서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생명수 샘물을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신다 (계 21:6). 그의 은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며 (4:14), 예수님은 그 풍성한 은혜의 바다로 바로 지금 우리를 초대하신다.

 

Whoever embraces one of these children as I do embraces me, and far more than me - God who sent me.


2022년 1월 15일 토요일

자기희생 (Mark 8)

 


우리에게 다가오는 삶의 고통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된 우리를 그냥 놔두시지 않고 고난을 통과하게 만드신다.

인간관계의 갈등, 육체적 고통, 정신적 불안감 등 끊이지 않는 삶의 고난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서서 묵묵히 다가올 소망을 기다려야 한다.

혼자만의 노력으로 되지 않음을 알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들이 다른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그들 역시 함께 고난 중에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위한 나의 희생이 필요함을 알게 해준다.

'나'와 '너'의 갈등이 수많은 삶의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신을 희생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타인을 섬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그 고난속으로 직진하셨다.

나의 참된 자아는 희생과 섬김속에서 발견되며, 구원은 참된 자아를 찾을때 완성된다.

 

Don't run from suffering; embrace it. Follow me and I'll show you how. Self-help in no help at all. Self-sacrifice is the way, my way, to saving yourself, your true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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